“돈 내고 재미로 저격”… 보스니아 내전 ‘인간사냥 관광’ 수사 개시

정의길 기자 2025. 11. 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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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검찰, 사라예보 ‘시민 저격 관광’ 수사
거액 주고 세르비아계 병사들의 저격 동참
“무기 애호하는 극우 동조자들도 용의자”
보스니아 내전이 벌어진 지난 1993년 사라예보에서 시민들이 저격을 피하기 위해서 몸을 숙여서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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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단골 소재 중 하나인 ‘인간 사냥 관광’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규명하는 수사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이탈리아 밀라노 검찰은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탈리아 등 서방 국가 시민들이 사라예보 시민을 저격하는 관광을 했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를 개시했다고 현지 매체 일조르노와 가디언 등이 1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저격수 관광객’이라고 불린 서방 관광객들은 당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군대 병사들에게 돈을 주고 사라예보 시민들을 저격하는 데 동참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서방 관광객들이 비용을 치르고 재미로 사람들을 저격했다는 것인데, 이탈리아 언론들은 용의자들이 “무기를 좋아하는 극우 동조자”들이었다고 전했다.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 때 독립을 선언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분리독립을 반대하면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내전이 벌어졌다. 이때 봉쇄된 사라예보에서 1만1천명 이상이 숨졌다. 세르비아계 병사들이 사라예보 주변 언덕에 자리 잡고는 어린이를 포함한 시민들을 무작위로 저격해 이를 두고 ‘비디오 게임’, ‘사파리’라고 불렀다.

알레산드로 고비스 검사장이 지휘하는 밀라노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당시 인간 사냥 관광에 연루된 이탈리아인들의 신원을 파악해 처벌할 방침이다. 수사는 이 사건에 대한 증거를 수집해온 밀라노의 작가 에치오 가바체니의 고발로 시작됐다. 라예보의 전 시장인 베냐미나 카르치도 밀라노 검찰에 관련 보고서를 보냈다.

가바체니가 제출한 17장의 고소장을 보면, 용의자들은 이탈리아 북부 트리에스테에 모여서 세르비아 사라예보로 갔고, 세르비아계 병사들은 이들을 사라예보 주변의 언덕으로 데려가 거리의 시민들을 저격하게 했다. 이런 ‘관광’은 세르비아 정보기관과 연계된 네트워크가 뒷받침하고, 유고연방의 회사들이 서비스를 지원했다고 한다. 가바체니는 ‘이탈리아 대외정보국 간부에게 이탈리아인 “저격수” 최소 5명을 고지했다’고 주장하는 보스니아군 정보국 요원과의 이메일도 제출했다. 이들 이탈리아인은 토리노, 밀라노, 트리에스테 출신이었다는 목격자의 진술도 있다.

안사 통신은 가바체니를 인용해 “이런 살인에는 가격표가 붙었다”며 “어린이들이 더 비쌌고, 그다음이 남자(가급적 군복을 입고 무장한 경우), 여자(순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노인은 무료로 죽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오늘날 밀라노 중심가에서 방 3개짜리 아파트를 살 만한 돈 또는 최대 10만유로(1억6천만원)을 내야 했다고도 보도됐다.

가바제니는 지난 1990년대 이탈리아 언론에 보도된 저격수 관광에 대한 보도를 처음 접했고, 지난 2022년 슬로베니아인 감독 미란 주파니치가 제작한 관련 다큐멘터리인 ‘사라예보 사파리’를 보고 나서, 조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한 세르비아계 병사와 청부업자가 서방 관광객들이 사라예보 주변 언덕에서 민간인들을 저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세르비아계 병사들에 의해 그동안 강력히 부인됐다.

가바체니는 “그 다큐멘터리 감독과 접촉하면서 조사를 시작해 밀라노 검찰에게 제출할 정도로 충분한 자료들을 모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 잔혹한 ‘살상 게임’에 “정치적 혹은 종교적 동기도 없었다”며 “그들은 재미와 개인적 만족 때문에 그곳으로 간 부자들이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 총을 좋아해서 사격장이나 아프리카 사파리에 가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지금 말하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가바체니는 “사람들을 저격하려고 그곳으로 간 전쟁 관광객들이 있었다”며 “악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관련된 이탈리아인들을 일부 파악했다며, 이들은 몇주 내로 검찰에 소환될 것이라고 밝혔다.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군에 의해 봉쇄된 사라예보 거리에서는 저격이 일상화되어서, 시민들은 이를 피해 몸을 숙이면서 다녀야 했다. 사라예보 시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인 ‘메샤 셀리모비치’ 대로는 ‘저격수 길’로 불렸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라예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저격당한 연인인 보슈코 브르키치와 아드미라 이스미치가 숨진 채 며칠 동안이나 보스니아와 세르비아계 경계에서 방치된 장면이 나와, 당시 상황의 비극을 드러냈다.

가바체니를 돕는 변호사 니콜라 브리지다는 “오랜 조사 끝에 축적된 증거들이 잘 입증됐고, 범인들을 파악하는 심층적 수사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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