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작용 설명도 없이 "빨리 사인하세요"… 피부 시험 '대충' 해도 식약처는 뒷짐만
<3> K뷰티의 그늘
화장품 인체적용시험기관 직접 가봤더니
가격 경쟁 탓? 설명 생략 등 허술한 운영
식약처 "문제 적발 시 조치" 사후 관리만
편집자주
의약품 효능과 안정성을 검증하는 임상시험이 매년 1,000건 진행된다. 지난해에만 16만 명이 참여했다. 누군가는 더 나은 치료를 위해, 누군가는 경제적 보상을 받으려 임상시험을 선택한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보호할 제도와 감독은 느슨하고 허술한 실정이다. 한국일보는 4회에 걸쳐 임상시험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해본다.

"자외선 차단제 시험인 건 알고 오셨죠? 6개월에서 1년 정도 태닝(피부 그을림) 자국이 남을 수 있어요."
지난 8월 경기 소재 화장품 인체적용시험기관 D사. 자외선을 인위적으로 쪼면서 차단제 효과를 확인하는 시험에 참여한 기자에게 D사 직원은 "설명서를 읽고 동의하면 사인하라"며 이렇게 안내했다. 직원 말대로면, 피부 그을림 정도만 걱정하면 된다는 얘기. 홈페이지 안내에도 부작용 언급은 별도로 없었다.
하지만 별도로 받아 본 시험 계획서에는 부작용이 잔뜩 써 있었다. '피부색이 변할 수 있다'는 안내 외에도 인설(피부 세포가 죽어 떨어져 나가는 것), 작열감(피부가 타는 듯 화끈거리는 느낌), 소양증(피부를 긁고 싶은 느낌), 자통(찌르는 듯한 아픔), 발진(피부색과 모양이 변하는 증상) 등이 '발생 가능한 부작용'으로 빼곡했다. 시험 부작용 고지라는 참여자 권리 보장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깡그리 무시된 것이다.

'K-뷰티' 열풍으로 국내 화장품 시장이 커지면서 새로운 화장품 개발을 위한 시험 진행 횟수도 덩달아 늘고 있다. 2020년 4,375건 진행된 시험은 지난해 9,984건으로 5년 만에 2.3배 증가했다.
참여 인원도 증가 추세다. 2020년 8만5,191명에서 2024년 17만9,343명으로 늘었다. 역시 2배 이상이다. 이 기간(5년) 누적 참여자는 62만7,637명에 달한다. 이는 민간 협의체인 한국인체적용시험기관협의회 회원 30곳 중 21곳이 제출한 통계에 기반한 수치다.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회원사가 9곳이고, 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은 곳이 10곳 정도 더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실제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일보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시험에 참여하고, 충분한 설명을 듣는 등 참여자의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화장품 인체적용시험기관 D사와 함께 서울에 위치한 P사, H사를 방문했다. 세 기관의 시험 참여자는 2020~2024년 총 29만7,722명(P사 13만6,349명·H사 8만5,600명·D사 7만5,773명)으로 전체 참여자의 절반(47.4%)에 육박한다.

설명 생략한 채 "동의서 서명하라"
시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인체적용시험기관의 기본적인 의무다. 식약처는 지난 4월 배포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시험책임자 또는 시험책임자의 위임을 받은 자는 시험의 모든 정보를 참여자에게 충분히 알려야 한다'고 알렸다. 그러나 기자가 방문한 세 기관 중 이를 지키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H사는 자외선 차단제 내수성 시험을 진행하며 시험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을 구두로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험담당자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고 충분히 이해했다'는 동의서에 사인하도록 했다. '듣고 이해했다'는 글자를 그대로 따라 쓰라고도 했다. 부작용을 안내하지 않은 채 "특별한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D사는 건강 상태 문진 서류를 배부한 뒤 "'아니오'(문제없다는 뜻)에 쭉 체크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꼼꼼하게 읽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작용에 대한 고지는 홈페이지 등에도 보이지 않았다. 참여자들은 통상 각 기관 홈페이지를 통해 어떤 화장품에 대해 시험이 진행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참여를 결정하는데, 여기에 부작용을 기술해둔 곳은 없었다. 보상 안내도 미흡하긴 마찬가지였다. H사와 D사는 보상 안내를 전혀 하지 않았고, P사는 별도로 계약한 피부과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면서도 "과민한 피부일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서류 배부 안해... 연구진 부족 의심도
이들 기관은 시험 관련 설명서 배부에도 인색했다. 인체적용시험 자체가 의학 연구의 일종으로 용어와 절차 등 설명해야 하는 내용은 방대할 수밖에 없다. 부작용 발생 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등도 설명서를 꼼꼼히 읽어야 확인이 가능하다. 식약처가 기관에 '참여자에게 제공하는 문서에 부작용 발생 시 주어질 보상 및 치료 방법, 부작용 발생 시 접촉해야 하는 사람 등의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러나 세 기관 모두 시험 정보가 담긴 문서를 아예 보여주지 않거나 동의서 작성 당시 잠깐 보여준 뒤 바로 회수해갔다. D사는 '왜 설명문을 보여주지 않은 채 동의서에 서명을 받아가냐'고 묻자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묻지 그랬냐"고 책임을 떠넘겼다.
시험은 '5년 이상 경력'을 지닌 연구자 감독하에 진행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H사는 지난해 3만 명을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했는데, 5년 이상 경력자는 지난 8월 기준 16명에 불과했다. 조사 시점이 다르기는 하나 연구 인력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 명의 연구자가 1,875명을 감당하는 건 사실 무리다. 하나의 시험이 보통 수차례의 방문을 요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연구자 한 명이 담당하는 참여자는 더 많을 수밖에 없다.
P사는 그러나 "이상반응 발생 건수는 전체 시험의 0.025%밖에 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해 운영하고 있으며,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다"고 강조했다. D사는 "내부 검토 후 시정할 부분은 시정하겠다"고 밝혔다. H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자율 규제"라며 '뒷짐' 진 정부
전문가들은 이 같은 시험기관의 허술한 운영이 화장품 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무관치 않다고 분석한다. 양재찬 목원대 화장품학과 교수는 "K-뷰티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시험도 많아졌다. 이러한 수요를 감당하고자 일부 기관이 '대충 또는 빨리빨리' 시험을 진행하게 된 측면이 있다"며 "기관 난립으로 출혈 경쟁이 발생하며 연구 인력 등에 대한 충분한 투자 없이 시험이 진행될 가능성도 커진 듯하다"고 진단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화장품학과 교수도 "기관 사이에서 '더 싸게 진행하겠다'는 식의 가격 경쟁이 발생하다 보니 참여자 권리는 뒷전이 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식약처의 느슨한 기관 관리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이들 기관은 민간업체로 식약처 등록 의무를 지지 않는다. 따라서 식약처는 기관의 운영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 식약처 관계자는 "시험은 기본적으로 '화장품 효능 표시'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시험이 부적절하게 진행된 사례 등이 적발된 경우에 한해 조치를 취할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K-뷰티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라도 인체적용시험 참여자 권리 보장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인체적용시험을 진행할 때 참여자 권리는 과학과 사회의 이익보다 우선한다'는 건 국제사회의 분명한 원칙이다. 김혜민 건국대 화장품공학과 조교수는 "새로운 규제는 어떤 식으로든 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도입이 쉽지 않지만, 기관 설립 요건 등을 강화하는 방식 등으로 관리에 나설 필요는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신은별 기자
취재: 이유진 기자, 백혜진•황은서 인턴기자
인터랙티브: 한규민 디자이너, 윤창원 개발자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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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프롤로그
- • 설명서 단 5분 읽고 임상시험에 동의했다...100만 원에 거래되는 '빈자'의 건강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5150003871) - • "내 건강을 팝니다"…그런데 임상시험 이해는 하셨나요? [인터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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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서 단 5분 읽고 임상시험에 동의했다...100만 원에 거래되는 '빈자'의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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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수상한 삼각관계
- • 아빠 병원에서 임상시험하고 처방한 그 약, 아들 회사에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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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9250005070) - • "임상시험 모집과 참여 동기가 돈이 되어선 안 된다"...뉴욕의 모집 회사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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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8230002228)
- • 아빠 병원에서 임상시험하고 처방한 그 약, 아들 회사에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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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가난에 빚지다
- • 아내는 임상시험 받다 떠났다..."비용 부담하겠다"는 말을 외면 못 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180000909) - • "분명 돈 때문인데, 돈 때문이어선 안 된다"...임상시험 '딜레마'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230003739) - • 임상시험 받던 아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6년 소송 엄마는 여생을 잃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21520002581) - • '갈 길 먼' 임상시험 피해 보상...합의 안 되면 소송 말고 길 없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250002324)
- • 아내는 임상시험 받다 떠났다..."비용 부담하겠다"는 말을 외면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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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K뷰티의 그늘
- • "반찬값 벌려고" 최저시급에 피부 맡기는 4050 경단녀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6070001262) - • 부작용 설명도 없이 "빨리 사인하세요"… 피부 시험 '대충' 해도 식약처는 뒷짐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300003485) - • "규칙 만들고 스스로 지킨다"…화장품 시험기관 '자율 관리' 한계 또렷하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430001872) - • '볼 패임, 가슴 볼륨 크림으로 메우세요'...과대광고 보증 서는 인체시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7050002868)
- • "반찬값 벌려고" 최저시급에 피부 맡기는 4050 경단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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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임상시험 강국으로
- • "어렵고 긴 설명서,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싹 바꿔야"...WHO '충고' [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1190002150) - • "임상시험 강국 꿈꾼다면…참여자 권리부터 챙겨야"[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1220002148)
- • "어렵고 긴 설명서,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싹 바꿔야"...WHO '충고' [인터뷰]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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