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값 벌려고" 최저시급에 피부 맡기는 4050 경단녀들
<3> K뷰티의 그늘
'경력 단절' 여성들 직업 된 '피부 알바'
화장 24시간, 진정도 보려 상처 내고
저임금·부작용에도 "써주는 곳 여기뿐"
편집자주
의약품 효능과 안정성을 검증하는 임상시험이 매년 1,000건 진행된다. 지난해에만 16만 명이 참여했다. 누군가는 더 나은 치료를 위해, 누군가는 경제적 보상을 받으려 임상시험을 선택한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보호할 제도와 감독은 느슨하고 허술한 실정이다. 한국일보는 4회에 걸쳐 임상시험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해본다.

"홍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네요. 치료받고 다시 도전해야죠, 뭐."
지난 9월 화장품 인체적용시험을 진행하는 H사에서 만난 강영희(58)씨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H사에서는 화장품의 일종인 세럼의 안전성 및 효능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강씨는 '피부 알바(아르바이트)' 10년 경력자. 이날도 신제품 개발 연구에 피부를 내주고 사례금을 받겠다며 이곳을 찾았다.
강씨는 그러나 '퇴짜'를 맞았다. '얼굴에 붉은 기가 돈다'는 이유에서였다. 실망한 강씨는 그 길로 피부과 진료를 예약했다. 시험 참여 사례비는 2만 원, 피부과 진료는 이보다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시험에 참여하려는 이유는 뭘까. 그는 "이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다음에 또 떨어지면 안 된다"고 답했다.
강씨는 결혼과 육아로 직장을 그만뒀다가 40대 후반, 취업 시장으로 돌아왔다. 냉랭한 시장 상황에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는 힘들었다. 경쟁에서 번번이 밀렸고, 어느새 '경력 단절 여성'이 됐다. 그때 접한 게 피부 알바였다. "피부 내어주는 게 제일 쉽더라고요."
한국일보는 8월부터 두 달 동안 '피부 알바생'이라 불리는 화장품 인체적용시험 참여자 25명과 인터뷰를 가졌다. 대부분은 스스로를 '경단녀'라고 칭했고, 또 상당수는 중년이었다. 인체적용시험이 한국의 화장품을 일컫는 'K뷰티'를 떠받치고, 인체적용시험의 중심엔 바로 중년 여성이 있었다.
'뷰티 강국' 이면엔… '경단녀' 애환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은 이구동성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던 차에 인체적용시험을 접했다"고 말했다. 20년 전 육아 때문에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던 이모(50)씨는 "반찬값이라도 벌겠다는 마음"이었고, 20년 전 영어 강사였던 민모(51)씨는 "가만히 있으면 계속 기가 죽으니까 커피값은 벌어야겠다"며 인체적용시험에 발을 들였다.
주부 김모(44)씨는 또한 "새 일을 구하려고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며 "작은 아이가 '엄마는 왜 돈 안 벌어'라고 장난스레 물을 때 이젠 '나도 돈 번다'고 대꾸할 수 있어 좋다"고 웃었다. 민씨는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일을) 그만뒀는데, 50대라 일을 구하기가 쉽지 않고 요즘 아이들이 영어를 워낙 잘해 가르칠 실력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에게 피부 알바는 직업이었다. 수입은 시험에 따라 제각각이지만 일당으로 2만~3만 원을 받는다. '수입 제로'인 이들에겐 이 정도 수입도 소중하다. 1년 전 인체적용시험에 처음 참여했다는 이씨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여러 기관을 돌면서 인체적용시험을 한다"며 "화상 등 위험성이 있거나 자국이 남는 시험에 일부러 참여할 때도있다"고 말했다. 그는 발진을 유발한 뒤 세럼을 발라 그 효능을 보는 시험에 참여했다 가려움증이 2개월째 낫지 않고 있다면서 "돈을 더 주니까"라고 웃었다. 햇수론 5년째, 어림잡아 50번쯤 시험에 참여했다는 주부 김씨도 "한 달 버는 돈이 20만 원이 채 안 된다"면서 "얼굴에 시험을 받으면 두피나 머리카락 시험을 병행하는 식으로 수입을 늘린다"고 했다.

인체적용시험 참여 대상이 주로 중년 여성이라는 점은 수치로 확인이 가능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안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식품의약품안전처를 통해 확보한 19개 인체적용시험기관 연령별 자료를 분석해보면, 2020~24년 진행된 인체적용시험의 참여자 32만8,952명 중 40대 이상은 24만4,245명이었다. 4명 중 3명꼴로, 50대 이상으로 좁히면 13만3,478명(40.6%)에 이른다.
여기에 별도의 성별 자료에서는 같은 기간 전체 참여자 35만843명 중 여성은 32만7,790명으로 93.4%를 차지했다. 남성 참여자(2만3,053명)의 14.22배다. 두 자료를 겹쳐 보면 '40대 이상 여성'의 참여가 압도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자료는 인체적용시험기관의 민간협의체인 한국인체적용시험기관협의회가 30개 회원기관 중 19개로부터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한국일보가 2020~24년 인체적용시험을 가장 많이 진행한 실시기관 3곳(서울 P·H사, 경기 D사)을 방문했을 때도 이 같은 수치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8월 4일 오전 9시쯤 P사를 방문했을 때 현장에 대기 중이던 참여자 36명 중 남성은 2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에 인체적용시험에 참여한다는 A(46)씨는 H사 인체적용시험을 마치고 나오며 "비슷한 상황에 있는 엄마들이 많이 참여한다"고 말했다.
많이 모아 싸게 쓴다...권리는 뒷전

이 같은 중년 여성 쏠림은 여성 고용률 저하와 뗄 수 없는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여성가족부와 고용노동부가 공동 발행한 '2023년 여성경제활동백서'를 보면 2022년 기준 여성 고용률은 52.9%로, 남성 고용률(71.5%)과 18.6%포인트 차이를 보인다. 2012년 22.5%포인트에서 완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적잖은 차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수입은 어느 정도일까. 인체적용시험에 대한 참여자 모집은 각 기관이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진행하고, 참여자 모집이 종료되면 삭제된다. 그래서 P사, H사, D사 홈페이지를 통해 8월 6일~9월 19일에 걸쳐 올라온 게시물에서 인체적용시험 총 483건의 소요시간 및 사례비를 확인해봤다.
483건 가운데 86건은 시급이 올해 최저 시급인 1만30원에 미치지 못했다. 인체적용시험 사례비는 통상 참여자가 투입하는 시간, 화장품 효능 및 안전성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피부에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및 피해 등을 고려해 책정한다. 그럼에도 전체 17.8%가 최저 시급도 안 주고 참여자의 피부를 활용했다는 얘기다.
6,000원대(3건), 8,000원대(26건)도 있었다. H사는 여기에 '20분 이내의 인체적용시험 지연에 대해서는 별도 보상이 없다'고 못 박았다. 기관 사정으로 인체적용시험이 지연되는 등의 예외 사정을 고려하겠다는 추가 문구는 보이지 않았다. 참여자 모집이 어려워 사례비를 높여 모집할 수밖에 없는 여드름성 피부 대상 인체적용시험 등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평균 사례비는 1만3,741원 정도. 최저 시급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사례비가 많지 않지만, 수요는 적지가 않다. 그렇다 보니 사례비만 앞세워 참여자를 모집하는 기관이 적지 않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대상자의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는 것'을 전제로 시행되어야 한다. 인체적용시험기관들이 참여자에게 시험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는 뜻인데, '돈만 주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사 홈페이지에 가입한 잠재적 참여자를 상대로 '3번 방문 후 8만 원 지급' 등 문자를 대량 배포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D기관의 경우 '빠른 신청 요망, 남은 자리 아직 많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파티원 모집'이라는 문구를 내걸었다. '파티원'은 '특정 행위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신조어로, 보통 온라인 게임에서 쓰인다.
인체적용시험을 '새로운 화장품을 테스트해볼 기회'라고 안내하기도 한다. 인체적용시험이 엄연히 연구에 속하고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부작용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이를 화장품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로 포장하는 것이다. 2만 원가량의 소개비를 걸고 '지인을 데려오라'고 독려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인체적용시험기관 관계자는 "인체적용시험의 경우 임상시험과 달리 참여자 권리에 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례비, 모집 방법 등이 기관 자율에 맡겨져 있다"고 말했다.
'찍힐까 두려워'… 부당해도 참는다
인체적용시험 참여자들은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10년째 인체적용시험에 참여하고 있다는 50세 여성은 "저쪽(기관)은 갑이고 우리는 을인데 불만을 말하는 게 쉽겠나"라고 말했다. "화장품에 대한 설명이 정말 불충분해요. 그래서 '좀 더 설명해달라'고 했더니 기관 쪽 사람 표정이 확 굳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넘어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일이 끊길 것이란 두려움이 침묵의 가장 큰 이유다. 주부 서진경씨는 "화장품을 바르고 간지러워도 괜한 소리를 했다가 '돌아가라'고 하면 돈을 못 받게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용돈을 벌려고 왔다는 30대 여성은 "50번 정도 참여하는 동안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말한 적은 없다"며 "어떤 사람이 '공지된 시험 시간을 초과했는데 왜 추가 사례비를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가 다음부터 어떤 시험에도 참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때) '블랙을 먹인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했다. '블랙을 먹였다'는 건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뜻이다.
H사 건물 앞에서 만난 이종희씨는 연신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이것(인터뷰)도 센터 직원들이 보면 큰일 나, 나 잘릴 수도 있어." 인터뷰 내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는 이내 몸을 잔뜩 수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
팀장: 신은별 기자
취재: 이유진 기자, 백혜진•황은서 인턴기자
인터랙티브: 한규민 디자이너, 윤창원 개발자
■ 목차별로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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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프롤로그
- • 설명서 단 5분 읽고 임상시험에 동의했다...100만 원에 거래되는 '빈자'의 건강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5150003871) - • "내 건강을 팝니다"…그런데 임상시험 이해는 하셨나요? [인터랙티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10617110002351)
- • 설명서 단 5분 읽고 임상시험에 동의했다...100만 원에 거래되는 '빈자'의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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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수상한 삼각관계
- • 아빠 병원에서 임상시험하고 처방한 그 약, 아들 회사에서 만들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7120004185) - • 병원과 제약사, 임상시험 의약품 서로 몰아줘도...법은 막을 수 없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8040005198) - • 아빠·아들의 수상한 임상시험 생태계…1등 모집회사도 긴밀하게 '우리 편'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050001752) - • 사례비로 유혹하고 유령 회사 동원하고...'건강 판매' 부추기는 임상시험 모집업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9250005070) - • "임상시험 모집과 참여 동기가 돈이 되어선 안 된다"...뉴욕의 모집 회사는 다르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19240000996) - • 남자만 가득한 임상시험 병동...이유가 성호르몬 차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8230002228)
- • 아빠 병원에서 임상시험하고 처방한 그 약, 아들 회사에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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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가난에 빚지다
- • 아내는 임상시험 받다 떠났다..."비용 부담하겠다"는 말을 외면 못 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180000909) - • "분명 돈 때문인데, 돈 때문이어선 안 된다"...임상시험 '딜레마'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230003739) - • 임상시험 받던 아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6년 소송 엄마는 여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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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250002324)
- • 아내는 임상시험 받다 떠났다..."비용 부담하겠다"는 말을 외면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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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K뷰티의 그늘
- • "반찬값 벌려고" 최저시급에 피부 맡기는 4050 경단녀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6070001262) - • 부작용 설명도 없이 "빨리 사인하세요"… 피부 시험 '대충' 해도 식약처는 뒷짐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300003485) - • "규칙 만들고 스스로 지킨다"…화장품 시험기관 '자율 관리' 한계 또렷하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0430001872) - • '볼 패임, 가슴 볼륨 크림으로 메우세요'...과대광고 보증 서는 인체시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717050002868)
- • "반찬값 벌려고" 최저시급에 피부 맡기는 4050 경단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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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임상시험 강국으로
- • "어렵고 긴 설명서,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싹 바꿔야"...WHO '충고' [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1190002150) - • "임상시험 강국 꿈꾼다면…참여자 권리부터 챙겨야"[인터뷰]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102621220002148)
- • "어렵고 긴 설명서, 초등생도 이해할 수 있게 싹 바꿔야"...WHO '충고' [인터뷰]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황은서 인턴 기자 hes0803@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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