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다면 호텔, 호스텔 등과 함께 고려하게 되는 낯선 이름의 숙박 형태가 있다.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농가에 머무르며 숙박과 식사를 함께하는 농촌 체류형 관광 혹은 숙박 시설을 뜻한다. 1960년대 처음으로 등장한 이 단어는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푸른 자연 속 이탈리아 농촌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숙박 형태로 자리매김했다.
빌라 레나가 문을 연 2013년 레나 예브스타피예바- 제롬 아데이 부부와 입주 작가들이 저택 곳곳에 서 함께 찍은 사진. 사진=빌라 레나
지난 2013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주 한 외딴 언덕에 새로운 아그리투리스모가 문을 열었다. 인근의 피사나 피렌체에서 1시간 내외 차를 몰아야 가닿는 농촌 지역에 자리잡은 빌라 레나 아그리투리스모(Villa Lena Agriturismo)다. 1895년 이탈리아 귀족 가문이 지은 130년 역사의 저택을 중심으로 인근 농가, 마굿간, 사냥용 별장 등을 개조해 고급 숙박시설로 재단장했다.
2007년 이 일대를 매입한 레나 예브스타피예바(Lena Evstafieva)와 그의 남편인 음악가 제롬 아데이(Jerome Hadey)가 '예술과 일상, 자연이 만나는 창의적 휴식 공간'을 꿈꾸며 시작했다. 통상 1박에 300유로대에서 400유로대, 한화로 50만원을 훌쩍 넘어 여느 아그리투리스모와 비교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숙박료에도 투숙객이 끊이지 않는다.
한 때 마굿간으로 사용됐던 건물을 개조해 고급 숙소로 재탄생시킨 아그리투리스모 공용 공간. 기둥에 과거 말 고삐를 매달았던 고리가 보인다. 백지영기자
◇예술·숙박업 유기적 생태계=빌라 레나가 다른 아그리투리스모와 특히 차별화되는 점은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가 따로 또 같이 운영된다는 점이다.
빌라 레나를 상징하는 19세기 주홍빛 저택에 이 레지던시를 이끄는 비영리 민간 재단, 빌라 레나 재단(Villa Lena Foundation)이 자리잡고 있다. 재단이 운영하는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 역시 빌라 레나 부지에서 가장 화려한 이 중심 저택에 묵는다. 투숙객들이 묵는 공간은 한 때 마굿간이나 하녀용 숙소 등으로 사용됐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빌라 레나 저택 내 예술인 거주 공간. 백지영기자
빌라 레나 입주 작가들의 작업 공간. 과거 사냥터에 풀 새를 길렀던 건물들을 개조해 작가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백지영기자
숙박업을 비롯해 빌라 레나 부지 내 농장에서 기른 작물로 요리하는 레스토랑 운영, 빌라 레나 저택 정원을 결혼식장으로 임대 등 안정적인 수익 사업과 나란히 비영리 재단이 운영되고 있다. 투숙객의 휴식이 예술가의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아그리투리스모와 레지던시가 하나의 유기적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설립자 레나 예브스타피예바는 빌라 레나가 현대 미술과 문화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담은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빌라 레나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친밀하고 영감 가득한 공간에서 쉽게 현대 예술을 접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됐어요. 환대와 예술적인 경험을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융합하니 지금의 독특한 형태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빌라 레나의 중심이 되는 19세기 저택. 이곳에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빌라 레나 재단 사무실과 입주 예술가 숙박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백지영기자
현대 미술 분야에서 활동해 온 예브스타피예바는 예술가들과 가까이 지낼 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분위기가 정작 그들의 작품이 갤러리의 하얀 벽에 걸리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는 아쉬움을 느껴왔다. 예술과 문화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빌라 레나가 탄생했다.
예브스타피예바는 "예술가들의 창의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빌라 레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며 "투숙객을 위한 특별한 경험은 물론,벽에 걸린 인상적인 작품들 혹은 무심한 듯 자연 속에 놓인 예술적인 돌맹이 하나까지도 그 일환"이라고 했다. 예술가들이 이곳의 훌륭한 환경과 시설을 바탕으로 작업에 집중하며 큰 영감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빌라 레나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 빌라 레나에 입주했던 예술가의 디자인으로 라벨을 만들어 붙였다. 백지영기자
진정한 시너지는 이 공간 안에서 생겨나는 만남에서 비롯된다. 저녁 시간이면 투숙객과 예술가는 레스토랑에 모여 함께 식사하며 일상을 나눈다. 예술에 관심있는 투숙객들은 자연스럽게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예술가들 역시 전 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된다.
자연을 보존하고 누리는 것 역시 중요한 요소다. 빌라 레나는 축구장 70개 크기에 달하는 500㏊(151만 평) 규모의 숲과 포도·올리브 농장 등에 둘러싸여 있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뜨고, 간혹 야생 여우나 늑대·멧돼지가 출몰할 정도로 자연으로 가득한 곳이다.
예브스타피예바는 "시간이 지나면서 빌라 레나의 개념은 점점 더 발전하고 다듬어졌지만 핵심 비전은 변하지 않았다"며 "예술과 자연, 환대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몰입감 있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체류비 지불 유료 레지던시=레지던시에는 음악·영화·문학·패션·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한다. 이들에게는 저택 내 숙박 공간과 별도로 필요에 따라 외부 작업 공간이 주어진다. 한때 사냥용 새들을 길렀던 조그만 건물들을 개조해 작가별로 배정하고, 그외 목공 작업 건물이나 도예 작업 건물 등으로 쓰고 있다.
빌라 레나 도예 작업실 내 전기 가마. 백지영기자
빌라 레나 도예 작업실 앞뜰에서 도예 작품들이 건조되고 있다. 백지영기자
재단은 연간 40~50명의 입주자를 초대해 기간별로 5~8명씩 입주시키는데, 통상 4주 내외 머문다. 레지던시와 아그리투리스모 모두 난방 시설을 갖추지 않아, 겨울에는 빗장을 걸고 봄~가을에만 문을 연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곳이 유료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입주 예술가에게 숙박·작업 공간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때로는 활동비·재료비 등 소정의 금전 지원까지 나서는 국내 레지던시들과 대비된다.
주 5일 아침·저녁 식사가 포함된 1주 체류비로 150유로, 약 25만 원을 내야 하지만 입주하겠다는 예술가는 줄을 잇는다. 50명 모집에 지원자 300명, 6:1 정도의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다.
입주 예술가는 아그리투리스모 투숙객과 마찬가지로 수영장 등 빌라 레나 기반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한편 포도·올리브 수확이나 가을철 트러플 버섯 채집, 피자 같은 이탈리아 요리 체험 등에 나설 수 있다.
평소에는 하기 힘들었던 체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부터, 이곳을 둘러싼 고요한 숲에 영감을 받는 작가까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토스카나를 즐긴다. 일부 예술가는 '창의적 기여자(Creative Contributor)'라는 역할로 입주해, 투숙객을 위한 창작 체험 프로그램을 주 3회 진행한다.
베를린에서 온 가구 디자이너 마티아스 그슈벤트너가 빌라 레나에 있던 오래된 침대를 분해해 새로운 가구로 탄생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실 벽면으로 분해된 침대 머리판이 보인다. 백지영기자
독일 베를린에서 온 가구 디자이너 마티아스 크슈벤트너(Matthias Gschwendtner)는 "지인이 10년 전 빌라 레나 레지던시에 입주했는데,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추천해와 지원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입주 기간 빌라 레나에 있던 오래된 침대를 분해해 새로운 가구로 만드는 작업 등을 진행했다.
◇삶의 형태만큼 레지던시도 다양하게=재단은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외에도 다양한 레지던시를 운영한다.
먼저 지난 2023년 '큐레이터 레지던시'를 새롭게 시작했다. 큐레이터가 2달 간 이곳에 머물며 레지던시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소장품을 탐구하며 다양한 행사를 기획할 수 있는 레지던시로, 큐레이터들이 빌라 레나의 프로그램과 커뮤니티에 잘 어우러질 방식을 계속해 모색하고 있다.
앞서 2020년부터 운영 중인 '요가 레지던시'도 독특하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현재에 집중하는 빌라 레나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레지던시로, 이를 위한 실내 요가 공간과 야외 요가 데크도 마련했다. 입주한 요가 수련자는 매일 1회 아그리투리스모 투숙객을 위한 요가 수업을 한 차례 진행하는 대신, 일반적인 레지던시 입주 예술가들이 내는 체류비를 면제 받는다.
야외 수영장 옆으로 마련된 야외 요가 데크. 올리브 숲이 내려다보이는 데크 한 편에 요가 용품들이 구비돼 있다. 요가 레지던시 입주자는 이곳 혹은 실내 공간에서 하루 1차례 투숙객 상대 요가 수업에 나서는 대신 레지던시 체류비를내지 않는다. 백지영기자
'가족 레지던시'는 예술가들이 입주 기간 일과 육아 사이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입한 프로그램이다. 예술가를 포함한 자녀 동반 가족이 전체 혹은 일부 입주 기간 함께 체류할 수 있도록 했는데, 자녀는 연령에 따라 체류비를 면제 받거나 할인 받는다.
예브스타피예바는 "예술가들의 삶의 형태가 다양한 만큼, 가족과 함께 머물 수 있는 레지던시를 마련했다"며 "어린 아이가 있는 예술가들, 특히 여성 예술가들에게 돌봄의 책임이 창작 활동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돕고 싶었다"고 했다.
모든 입주 예술가는 이곳을 떠날 때 자신의 작품 한 점을 재단에 기증해야 한다. 지난 12년간 이곳에 머문 예술가는 약 600명. 이들이 남긴 흔적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어느덧 소장품만 약 1000점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빌라 레나의 품에 안긴 작품들은 저택의 복도와 레스토랑, 숙소 곳곳을 채우고 있다.
빌라 레나가 투숙객에게 임대하는 침대 머리 맡에 레지던시 입주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이 걸려 있다. 백지영기자
도시의 전시장에서 벗어나 자연과 일상으로 스며든 예술, 빌라 레나는 조화의 현장에 서 있다.
자연과 예술, 관광과 농업이 농업이 얽혀 만들어내는 느슨하지만 단단한 생태계. 그 안에서 '예술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언덕 위의 빌라가 조용히 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