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흉내내는 트럼프가 시진핑을 ‘황제’로 만들다

경주 아펙(APEC)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왕이 되고 싶은 자’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선물로 건넨 복제된 신라 금관을 받아들고 흐뭇한 표정을 지은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거래를 마치자, 왕관을 챙겨 곧바로 떠났다. 시진핑 주석은 아펙 정상회의의 주인공으로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 추진’을 선언했다. 무너지는 국제질서를 대신할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 모습을 연출했다.
지난달 30일 오전 11시께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부산 김해 공군기지에서 6년 만에 대면했다. 약 100분의 회담에서 트럼프는 중국에 펜타닐 관세 10% 인하와 추가 관세 부과 위협 취소를 내놨고, 대신 중국으로부터 펜타닐 원재료 미국 유입 차단, 희토류 통제 유예, 대두 등 농산물 구매를 약속받고 ‘휴전’했다.
하지만, 이 회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발표되지 않은 부분에 있었다. 지난 9월29일 미국 상무부 경제안보국(BIS)은 미국의 제재를 받는 외국 기업이 50% 이상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들까지 제재 명단에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가 시행되면 미국 제재 대상 중국 기업은 기존 1200여개에서 2만여개로 갑자기 늘어나게 될 예정이었다.
10월9일 중국의 반격이 나왔다. ‘중국산 희토류가 0.1%라도 포함된 제품의 수출을 통제한다’, 사실상 모든 희토류와 희토류 생산 기술, 리튬이온 배터리에 대해 수출 허가제를 도입하려는 조치다. 세계 희토류 공급의 거의 90%를 장악한 중국이 이 조치를 실제로 시행하면 전세계 첨단기술 제조업을 중국이 좌우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은 경악했고, 결국 이번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국 상무부가 내놨던 중국 기업들에 대한 제재 확대 조치가 슬그머니 1년 미뤄졌다. 대신 중국도 희토류 통제를 1년 유예해, 뽑았던 칼을 칼집에 잠시 집어넣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전략은 미국의 전략을 모방해 되갚은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국제규범 위반’으로 낙인 찍은 국가들을 국제금융과 인터넷, 첨단기술 네트워크에서 쫓아내거나 차단하는 ‘상호의존성의 무기화’를 통해 제재의 위력을 사실상 독점해왔다. 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중국이 전세계 첨단기술의 모세혈관에 해당하는 희토류 공급을 통제하는 ‘무기’를 만들어,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실행하려던 대중국 제재를 취소하게 만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더 이상 중국을 향해 ‘100% 관세 부과’ 같은 압박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불평등 조약’ 시대를 끝내고, 미국과 동등한 협상의 판을 만든 역사적 순간이었다. 물론 중국의 희토류 카드는 영원하지 않다. 미국은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를 비난하면서 동맹국들을 규합해 2~5년 안에 중국을 대신할 희토류 공급망을 만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동맹을 압박해온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실현할 능력이 없다고 본다.
중국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에게 ‘내년 4월 베이징 방문’ 초청장을 보낸 것에도 깊은 계산이 담겨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아시아 순방 내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싶다며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실질적 핵보유국)로 부르면서 ‘제재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고 유혹했지만 김 위원장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국정원은 북한이 물밑에서 미국과의 대화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확인했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 여지를 고려해 최선희 외무상의 중국·러시아 방문을 막판까지 고심했던 동향도 포착했다고 밝혔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을 고심하다가 결국 다음번 기회로 미룬 데는 중국의 영향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입장에서는 미-중 정상회담 직후에 곧바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만나 전세계의 관심이 여기에 쏠리면 시 주석의 외교적 성과가 가려지는 점을 우려했을 것이다. 중국은 내년에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시기가 북한에도 더 유리하다고 설득했을 것이다. 트럼프의 ‘구애’는 시진핑 주석의 ‘전략’에 가로막혔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귀국하는 길에 “일정이 너무 바빠서 (김정은과) 대화할 수 없었다”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내년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 일정과 연동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중국이 중재하는 모양새가 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방중 길에 평양이나 원산을 들르거나, 김 위원장이 중국 동북 지역을 방문해 재회하는 시나리오다.
2027년 말 4연임을 결정해야 하는 시 주석에게 2026년은 외교적으로 중요한 한해다. 4월 트럼프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전후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11월에는 광둥성 선전에서 아펙 정상회의를 주재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자유무역을 수호하자며 새로운 질서의 설계자 모습을 보일 것이다. 중화제국에 모여든 사절들처럼, 트럼프의 난동으로 엉망이 된 세계의 피난처가 된 중국으로 각국 정상과 기업인들이 모여드는 모습은 시 주석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중국이 장기 전략에 따라 롱게임을 벌이지만, 미국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단기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이번 미-중 ‘휴전’의 시한 1년은 2026년 11월 미국 중간선거 직전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2026년 7월4일 독립 250주년을 대대적으로 축하하면서 왕처럼 행세할 계획을 공표해 뒀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주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대만 문제를 꺼내지도 않았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내년 4월 베이징에서 시 주석이 대만을 포함해 주요한 의제들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면서 중간선거를 앞두고 희토류 통제에 나서겠다고 암시한다면 트럼프는 어떤 거래를 선택할까.
미국이 중국을 흔들 수 있는 수단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중국이 ‘중국제조 2025’에 이어 최근 ‘고품질 발전’까지 국가 주도의 산업전략을 통해 첨단기술 자급자족을 추진한 목적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 줄이기였다. 2020년 발표한 쌍순환 전략에서는 내수시장 기반을 강화(내부순환)하면서 동시에 무역·투자(외부순환)를 촉진해, 중국의 대외의존도는 줄이고 세계는 중국 경제에 더 많이 의존하게 만들겠다는 목표를 명확하게 밝혔다.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열세를 우세로 바꿔가는 모습은 중국 국내에서 시진핑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트럼프와의 대결이 없었다면, 시진핑의 절대권력과 장기집권, 점점 강화되는 사회 통제는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시진핑 시대’는 미국이 중국의 부상을 억누르고 공산당의 통치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위기와 불안 위에서 작동한다.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시작한 직후에 중국은 미국의 준동맹이 되었고 이후에는 미국 주도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주요 파트너였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중국 견제를 강화하자, 시진핑은 미국과의 대결 자세를 명확히 하면서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미국 제국주의와의 대결을 강조했던 마오쩌둥처럼, 시진핑은 미국의 압박에 대한 위기감과 안보 위협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미국의 압박에 맞서는 강력한 지도자의 위상을 강화해왔다.
중국 내에서 시 주석의 장기집권과 강화되는 통제, 끝이 보이지 않는 숙청, 부동산 위기와 내수 위축, 청년실업 등에 대한 불만이 있지만, 미국의 ‘괴롭힘'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은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트럼프의 서툰 강압은 시진핑이 지난 12년간 추진해온 기술·산업 강국화 전략의 정당성을 증명한다.
트럼프와 시진핑은 적대적 공생관계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왕관을 쓴 모습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등 절대권력자가 되기를 선망하고 중국 모델을 모방한다. 최고지도자에게 권력을 집중하고 극단주의 세력을 ‘홍위병’처럼 이용하고, 언론과 학자들을 압박하는 모습은 ‘미국의 중국화’로도 불린다. 문화대혁명(문혁)의 혼란을 기억하는 중국인들에게는 트럼프가 벌이는 ‘미국판 문혁’은 훨씬 안정된 중국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지난 1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선물한 샤오미 스마트폰을 받은 이재명 대통령이 “통신 보안은 잘 되냐”고 묻자 시 주석이 “백도어(후문)가 있는지 한번 보라”고 답한 것이 화제다. 미리 준비한 발언을 읽는 듯했던 전임자들과는 달리, 시 주석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농담을 한 것은 자신감을 보여준다.
1972년 9월27일, 중-일 수교를 위해 중국을 방문한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마오쩌둥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중국 공산당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회담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답해 좌중을 놀라게 했다. 최고 권력자의 발언은 거침이 없는 법이다. 언젠가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의 서툰 중국 견제가 없었다면 나의 4연임도,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변증법이요”라고 말하는 날도 오게 될까.

박민희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2007~2008년 중국 인민대학교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세계와 외교에 대해 취재하고 쓰고 있다. ‘중국 딜레마’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보이지 않는 중국’ ‘롱게임’ 등의 책을 번역했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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