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 안중근 루트] 안중근 의사 유해 116년 만에 빛 볼 수 있을까

정봉화 기자 2025. 11. 1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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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자협회 ‘안중근 루트’ 연수 참가기
(하)연해주에서 찾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이상설 선생 등 국외 항일투쟁 불씨 지펴
최근 한중 정상회담서 독립운동가 유해 발굴 공감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거주지였던 옛집. 현지 한인과 한국 정부 노력으로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정봉화 기자

한국기자협회가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의 외침, 그 현장을 가다'라는 주제로 특별연수를 마련했다. 올해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6주년이자 순국 11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0월 22일부터 27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중국 하얼빈을 시작으로 러시아 연해주, 간도, 단둥(단동)을 잇는 여정을 따라갔다. 항일투쟁사에서 상징적 장소인 하얼빈역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 하얼빈 지역을 둘러본 데 이어 연해주로 옮겨 독립운동 발자취를 뒤짚어본다.

중국 하얼빈에서 쑤이펀허(수분하)까지 이어진 야간열차 여정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TV에서 본 시베리아횡단열차처럼 침대칸 객실이다. 밤새 달린 열차에서 잠을 청하고 눈을 뜨니,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인 쑤이펀허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국경열차로 갈아탔다. 우리나라 옛 통일호 같은 오래된 객차 안에는 중국인과 러시아인이 자연스럽게 섞여 앉아 있었다. 국경이 맞닿은 대륙에서 철도가 얼마나 중요한 교통 인프라인지 실감했다.

러시아 국경도시 포그라니치니에 도착해 까다로운 입국 절차를 통과하고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이곳은 미처 몰랐거나 잊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도시였다. 최재형·이상설 선생의 흔적이다.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두 선생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10월 말의 러시아 날씨가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최재형 선생 애칭인 '페치카'를 전시해놓은 모습. /정봉화 기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 최재형(1860~1920) 선생의 러시아 이름이다. 한인 사회에서는 '최 페치카(러시아식 난로)'라 불렸다. 얼어붙은 땅 러시아에서 생존 필수품인 페치카를 애칭으로 불릴 만큼 그는 한인들에게 존경받는 든든한 존재였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 의사는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

'최재형기념관' 입구에는 페치카가 상징물처럼 놓여 있다. 최 선생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옛집을 현지 한인들이 러시아 정부와 협상 끝에 한국 정부 지원을 받아 2019년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같은 해 마당에는 흉상과 기념비도 세워졌다.

기념관 안에는 선생의 사진과 기록물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함경도 경원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9세에 연해주로 이주한 그는, 선원 생활과 통역·군납 사업 등을 통해 쌓은 재산을 모두 항일운동과 동포 지원에 쏟아부었다.
최재형기념관에 있는 최재형 선생 기념비와 흉상. /정봉화 기자

'하얼빈 의거'에도 그의 역할은 컸다. 최 선생은 1908년 국외 항일무장단체 '동의회'를 조직했고, 안중근 의사도 그 일원이었다. 안 의사는 거사 전 최 선생 집에서 머물며 사격 연습을 하고,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았다.

최 선생은 1909년 자금난으로 폐간된 한글 교민신문 <해조신문>을 인수해 <대동공보>로 재간행하며 항일 의식을 고취했고, 1911년에는 독립운동단체 '권업회'를 조직해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됐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20년, 일본군이 한인 마을을 습격한 '4월 참변' 당시 체포돼 총살됐다.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다.

2023년 국가보훈부는 선생이 순국한 장소로 추정되는 기념관 뒤편 언덕의 흙을 채취해, 부인 최 엘레나 여사 유해와 함께 현충원에 안장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라즈돌나야강 인근에 세워진 이상설 유허비. /정봉화 기자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 이상설

라즈돌나야강(수이펀강) 변에서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 유허비를 찾았다. 1907년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진 그는, 안중근 의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독립운동가였다.

안 의사는 뤼순감옥에서의 심문 과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포부가 크며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애국심이 강하며 교육 발달을 기도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세울 사람이다."

충북 진천 출신인 이 선생은 공부 천재였다. 수학과 과학 등 신학문에 밝았고, 27세에 성균관장을 지냈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 수학교과서 <산술신서>를 집필했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가 설치된 강가 모습. /정봉화 기자

을사늑약 이후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해 항일운동 길을 걸었다. 연길 용정에 항일 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던 중 1907년 헤이그특사로 활동했다. 1914년에는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5년 앞서 국외 최초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해 정통령에 추대됐다.

1917년 순국을 앞두고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루라. 나는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제국에 돌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으고 그 재도 바람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

선생 뜻에 따라 지금 남은 것은 이국 땅 강변의 이 유허비뿐이다. 이 비석은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이 세웠다. 최근 충북 지역에서는 선생의 서훈 등급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에서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격상하자는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단지동맹비 기념공원. /정봉화 기자

독립투사 품은 항일투쟁 중심지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한인 집단 거주지였던 '개척리'와 '신한촌'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한때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모여들어 항일운동 중심지로 성장했던 곳이다.

옛 '카레이스카야(한인) 거리' 모습은 사라지고, 지금은 젊음의 거리로 불리는 '아르바트 거리'(포킨제독 거리)로 변했다. 이 일대에서 최재형 선생 생가와 <대동공보>사 터를 찾았지만,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연해주 마지막 방문지는 '단지동맹비'가 있는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연추하리)였다. 광복회 등이 2001년 세운 이 기념비는 강물 범람으로 훼손돼, 2006년 현지 농장을 운영하던 한국 기업 유니베라 건물 앞 공터로 옮겨졌다.

유니베라는 2011년 자체 예산으로 기념공원 형태로 새로 조성했고, 안중근 의사 손도장이 새겨진 조형물을 함께 설치했다. 이 공로로 유니베라는 올해 국가보훈대상자 포상식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중간에 끊긴 압록강단교와 무역교류를 이어가는 북중우의로가 나란히 서 있다. 건너편은 북한 신의주 모습. /정봉화 기자

유해 발굴, 남북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

탐방단은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이동했다. 예정됐던 백두산 등정은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무산돼 아쉬움을 남겼다. 대신 백두산 서파 입구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으며 그 마음을 달랬다.

러시아·중국과 북한 사이 국경선인 두만강과 압록강 줄기를 따라 마지막 일정지인 단둥(단동)에 도착했다. 강 건너는 북한 신의주. 유람선을 타고 휴대전화 줌으로 당겨보니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는 붉은 펼침막 글귀가 선명했다.

'압록강단교'를 걸었다. 1911년 개통된 이 다리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유엔군 폭격으로 끊겨 지금은 절반만 남아 있다. 전쟁의 상흔이자 분단의 상징이 된 이 다리는 이제 관광명소로 변해 많은 인파로 붐볐다. 바로 옆, 1943년 개통된 북·중 무역통로 '북중우의교' 위로는 대형 트럭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압록강 건너 북한 신의주 방파제에 걸려있는 붉은색 펼침막. /정봉화 기자

귀국 후 전해진 한중 정상회담 소식에서 두 정상이 중국 내 항일 독립운동가 유해 발굴과 유적지 보존 필요성에 공감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국가보훈부 역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의지를 표명했다.

그동안 중국은 안 의사 고향이 황해도 해주라는 점을 들어 남북 공동조사·발굴 필요성을 주장해왔다. 이제야 비로소 남북과 중국이 머리를 맞댈 현실적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이 서로의 주권을 존중하고 협력할 때 동북아 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조국은 해방됐지만 여전히 분단된 현실 속에서, 한·북·중이 함께 독립운동가 유해 발굴에 나선다면 안 의사는 '천국에서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유언 인용) <끝>

/정봉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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