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현대 43세 ‘정기선 회장’ 체제 출범…빨라진 ‘승계 시계’에 재계 지각변동 가속
한진·DB·한국앤컴퍼니는 승계 완료 후에도 경영권 리스크 여전
(시사저널=이석 기자)
HD현대그룹은 10월17일 사장단 인사를 통해 정기선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다. 신임 정 회장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손자이자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장남이다. 2009년 현대중공업(현 HD현대중공업) 대리로 입사하면서 그룹 경영에 합류했다. 이후 재무·인사·영업·기획 등의 부서를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재벌가 자제답지 않게 현장을 중시하고, 직원들과도 격의 없는 소통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계의 한 인사는 "정 회장은 그룹 경영에 합류하기 전에 동아일보 기자로 잠깐 근무한 적이 있다"면서 "당시 편집국 내부에서 정 회장이 재벌 3세인 줄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성격이 소탈하다"고 설명했다.

주요 그룹 중 처음으로 1980년대생 총수 등장
이번에 정 회장이 취임하면서 HD현대그룹은 37년 만에 오너 경영에도 복귀했다. 주목되는 사실은 정 회장이 1982년생으로, 43세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재계 수장들의 세대교체가 가팔라지고 있다. HD현대를 포함해 삼성(이재용 회장)과 현대차(정의선 회장), LG(구광모 회장), 신세계(정용진 회장), 한진(조원태 회장) 등 오너가 있는 10대 그룹 중 6곳이 오너 3·4세 중심의 젊은 총수로 바뀌었다.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1940·50년생 총수는 허창수 GS건설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세 명뿐이다.
범위를 10대 그룹 밖으로 확대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난해 7월 형제 경영을 마치고 효성그룹과 분리한 조현상 HS효성 부회장과 윤호중 HY(옛 한국야쿠르트)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 조현범 한국앤컴퍼니 회장,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김남정 동원그룹 회장, 이승찬 계룡건설산업 회장, 최성원 동양고속 회장, 김남호 DB그룹 명예회장 등이 모두 1970년대생이다. 재계 막내로 한때 비공식 행사의 사진 촬영을 자처했던 최태원 SK그룹 회장(1960년생)이 현재는 재계의 '맏형'이 됐을 정도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오너 2세 시절만 해도 그룹 경영권은 부모의 유고 때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서 "요즘은 일찌감치 자녀를 경영에 참여시키고, 여건이 됐다 싶으면 속도감 있게 넘기는 게 트렌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는 지난해 말 국내 100대 그룹 총수 일가 835명 중 경영에 참여하는 290명의 승진 현황을 조사했다. 분석 결과 임원이 된 다음 부회장으로 승진하는 기간이 4세대에서 크게 짧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2세대는 평균 12.3년, 3세대는 12.9년 걸렸지만, 4세대는 10.4년으로 2년가량 줄어들었다. 회장 승진 속도는 더 빨랐다. 2세대와 3세대는 각각 16.5년과 18.7년 걸렸지만, 4세대는 회장 승진까지 12.7년으로 앞 세대보다 6년이나 단축됐다. 회장의 평균 나이는 각각 50.5세(2·3세대)에서 46세(4세대)로 낮아졌다.
1980년대생 회장 탄생에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기선 회장은 취임사에서 "우리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FOS(Future of Shipyard)'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최근 글로벌 선박 발주 감소와 중국의 시장 잠식으로 조선 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정 회장은 스마트 조선소 구축을 통해 중국과의 원가 격차를 줄이고, 아프리카와 남미, 동남아 등으로 시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회장 타이틀을 단 1970년대생 총수들의 행보도 다르지 않았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최근 서울 삼성동의 한 호프집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젠슨 황 CEO는 '호프 회동' 후 세계적으로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는 GPU(그래픽처리장치) 26만 장을 한국에 우선적으로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엔비디아의 인공지능(AI) 인프라 생태계에도 한국 기업을 참여시키면서 '소버린 AI'(인공지능 주권)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취임한 1970·80년대생 회장들은 확실히 아버지 때와 다르다"면서 "유학 경험과 글로벌 네트워크, 젊은 감각에 동반한 IT 지식을 바탕으로 그룹이 추진하는 신사업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 막내'였던 최태원 회장 어느덧 맏형으로
하지만 일각에선 우려도 제기된다. 총수 자리에 올랐지만, 지분을 승계받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일례로 신임 정기선 회장이 바통을 이어받은 HD현대의 경우 최대주주는 여전히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26.60%)이다. 정기선 회장의 지분율은 6.12%에 불과하다. 6%대 지분율로 자산만 74조원에 이르는 거대 그룹을 이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온전한 총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보유한 지분을 물려받아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몽준 이사장이 보유한 HD현대 주식 2101만 주의 가치는 11월4일 종가 기준으로 4조4226억원에 이른다. 현행 증여세율(60%)을 감안하면 2조6500억원대 증여세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난해 정 회장이 HD현대와 HD한국조선해양에서 받은 급여(22억7000만원)와 배당금(174억원)으로 이 세금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거나 국세청에 현물을 납부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정 이사장 보유 지분의 절반 이상이 현재 주식담보대출의 담보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이 '무늬만 총수'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그룹의 지배력을 확보하기까지는 향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범(汎)현대가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역시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 회사인 현대모비스나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등의 지분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차그룹은 2018년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현대모비스 모듈 및 AS 부품 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해 정 회장이 최대주주인 현대글로비스에 흡수 합병시키는 안을 추진했던 것이다. 정 회장의 지분 승계 역시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됐으나 주주 반발로 실패했다. 이후 지분 승계를 위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해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최근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는 정의선 회장의 입지도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남호 DB그룹 명예회장은 최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2000년 7월 그룹 회장에 취임한 지 5년여 만이다. 그를 대신해 회장 자리에 앉은 인사는 이수광 전 DB손해보험 사장이다. 80대 고령으로, 김준기 창업회장의 최측근으로 거론된다. 이후 김 창업회장은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 회사인 DB와 DB손해보험 지분도 추가로 매집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경영권 불안에 시달리는 것은 이미 지분 승계를 마친 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진그룹이 대표적이다. 한진그룹 이사회는 2019년 4월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을 지주회사인 한진칼 회장으로 선임했다. 고(故) 조양호 선대회장이 갑작스럽게 작고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지분 승계도 마무리 지었다. 조 회장과 어머니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 여동생 조현민(에밀리 조) 정석기업 사장 등이 현재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지분 20.5%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자산만 4조원이 넘는 거대 그룹을 이끄는 데는 지배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한국식 오너 경영의 폐해도 따져봐야
실제로 조 회장은 2020년 조현아(개명 후 조승연)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사모펀드 KCGI, 반도건설 연합의 공격을 받았다. 조 회장의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안심할 수 없는 처지다. 최근 호반건설이 잇따라 한진칼 지분 매집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지분율을 18.46%까지 끌어올렸다. 호반건설 측은 지분 매집 이유가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다. 재계 관계자는 "김상열 호반그룹 회장은 과거에도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시도한 바 있다"면서 "델타항공(14.9%)과 산업은행(10.58%) 등이 현재 조 회장의 우호 지분으로 거론되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국앤컴퍼니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조양래 명예회장은 2020년 보유 지분 전부를 차남인 조현범 당시 사장에게 넘겼다. 이듬해에는 그룹 회장직도 차남에게 맡겼다. 장남인 조현식 부회장은 고문으로 사실상 경영권에서 멀어졌다. 형제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장남인 조 고문과 장녀 조희경 한국타이어나눔재단 이사장, 차녀 조희원씨는 '반(反)조현범 연대'를 구성했다. 한정후견 개시 심판 창구를 법원에 제기한 것은 물론이고, MBK파트너스와 함께 공개매수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형제의 반란'은 모두 실패했다. 조 회장 역시 안정적인 경영권 유지를 위한 발판이 됐다는 평가다.
최근 변수가 발생했다.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현범 회장이 최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는 경영 공백에 따른 경영권 분쟁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조 회장의 지분은 현재 42.03%다. 조현식 고문(18.93%)과 조희원씨(10.61%)의 지분을 합친 것보다 월등히 많다"면서도 "조 회장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다시 수면 위로 불거질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추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한국식 오너 경영'의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재벌 구조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경영 시스템이다. 눈앞의 실적만 따지는 전문경영인 체제와 달리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한 장점이 있지만 오너 리스크나 편법 승계 논란 또한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면서 "이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역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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