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적 합리성’으로 약탈적 무역 합의 그나마 ‘선방’?

“한국은 트럼프로부터 일본보다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면서 전반적으로 덜 가혹한 무역 합의를 체결했다.” 〈뉴욕타임스〉가 10월29일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된 직후 내린 한·미, 한·일 무역 합의에 대한 총평이다.
크게 두 가지의 함의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 한국은 트럼프와 협상해서 일본보다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둘째, 트럼프는 동맹국인 한·일 양국 모두에게 찬물을 뒤집어씌웠다. 한국은 ‘덜 가혹한’ 대접을 받은 것뿐이다.
■ 세계가 주목한 한·미 무역 협상
지난 7월 한·일 양국은 트럼프 행정부와 ‘기본 무역 합의’를 마무리했다. 주된 내용은, 미국이 한·일 제품에 대한 수입 관세를 25%에서 15%로 내리는 대신 한국은 3500억 달러, 일본은 5500억 달러를 미국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후 ‘기본 합의’의 구체적 세부 사항(투자를 언제 어떻게 하고, 수익은 어떻게 배분하며, 리스크는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을 둘러싸고 협상이 이어졌다.
일본은 지난 9월 초, 한국보다 먼저 협상을 마치고 양해각서(MOU)에 서명했다.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수입 관세율이 25%에서 15%로 인하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경주 APEC 회의가 열린 10월29일까지 ‘트럼프 협상단’과 치열하게 싸웠다. 트럼프는 한때 “3500억 달러 전액을 현금으로 즉시 납입하라”고 요구했다. 한국 측은 ‘외환보유액(4200억 달러 정도)의 80% 이상이 한 번에 소진돼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10월29일 당일 오전까지도 양국 정부 관계자들은 협상 타결에 회의적이었다고 알려졌다. 일본이 전격 양보하면서 합의문에 서명까지 마친 직후였기 때문에 세계의 눈은 한국에 쏠려 있었다. 한국의 대응에 따라 다른 나라들도 미국에 대한 협상 수위를 조절할 수 있을 터였다.
한·미 협상은 10월29일 타결되었으나 합의문이나 양해각서(MOU) 등 구체적 공문서는 11월 초쯤에나 나오리라 보인다. 그러나 미·일 MOU를 참조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동아시아 동맹국들에게 ‘투자’가 아니라 ‘상납’을 요구한 정황이 확연하다.
■ 미·일 협의, 미국이 언제나 승리하도록
미·일 MOU에 따르면, 일본은 5500억 달러를 미국에 출자하지만 투자자로서 권리는 거의 누릴 수 없다. 그 돈의 투자처를 결정하는 자들은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로 채워진 투자위원회(위원장은 러트닉 상무장관)와 트럼프 본인이다. 일본 측은 미·일 양국이 지정한 인사로 구성된 자문위원회(Consultation Committee)에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위원회의 의지를 꺾을 비토권은 없다. 일본의 투자금은 트럼프 행정부의 쌈짓돈과 다를 바 없다.
미·일 MOU는 ‘미국 측이 선의·성실(good faith)의 원칙(상대방인 일본을 속이거나 기만하면 안 된다는 뜻)하에 투자 프로젝트를 선정해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를 보장하는 장치는 없다. 이 문서에 따르면, 일본의 자금이 투자될 업종은 반도체, 의약품, 인공지능, 조선, 양자 컴퓨터 등 “미국의 경제 및 국가안보 이익을 증진”하는 분야로 특정된다. 그러나 ‘반드시 특정된 업종에만 투자할 필요는 없다(including but not limited)’는 단서가 달려 있다. 예컨대 트럼프 본인과 친지들이 암호화폐 회사에 투자해서 사익을 취하는 경우, 일본 측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측이 ‘암호화폐는 국가안보 사업’이라고 주장하면, 일본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트럼프는 때때로 한국과 일본이 투자금을 ‘전액 즉각 납입’하기로 했다고 허세를 떨었다. 그러나 일본 역시 트럼프가 투자 프로젝트를 선정할 때마다 ‘시시때때로’ 송금하게 되어 있다. ‘전액 납입’이 아니다. 물론 일본이 송금을 거부하면, 트럼프는 관세를 다시 올릴 수 있다고, 미·일 MOU는 규정하고 있다.
일본이 송금한 달러는, 미국이 설정한 여러 개의 ‘투자 펀드(Investment SPV)’로 들어간다. 각 투자 펀드의 운용 책임자 역시 트럼프 정부가 지정한다.

일본도 투자 명목으로 돈을 낸 만큼 ‘원금과 약정이자(원리금)’는 돌려받게 되어 있다. 예컨대 ‘양자 컴퓨터 펀드’가 이 부문 사업체에 대한 투자로 수익을 내면, 미국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돈(잉여현금흐름)의 50%를 일본, 나머지 50%를 미국에 배당한다(수익배분 조건). 일본이 해당 투자 펀드로부터 받은 돈이 쌓여 원리금과 동일해지면, 수익배분 조건은 자동적으로 ‘미국 90%, 일본 10%’로 전환된다. ‘다 갚았으니 이제 우리가 독식한다’는 의미다.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다. 높은 수익을 내는 펀드(업종)는 원리금을 갚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미국은 단기간에 순수익의 90%를 갖게 된다. 낮은 수익을 내는 투자 펀드의 경우엔, 일본이 설사 수익의 50%를 배당받더라도 원리금의 상환이 영구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즉, 수익률이 높으면 미국이 독점적 인센티브를 누리고, 수익률이 낮으면 일본의 손실이 확정된다. 트럼프 정부는 투자 펀드들의 수익 중 어느 정도를 세금으로 받느냐에 따라 일본에 대한 배당을 멋대로 조정할 수도 있다. 미국이 언제나 승리하도록 설계된 게임이다.
미·일 MOU는 “미국, 일본, 투자위원회와 관계자들은 (펀드의 운용과 결과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미국과 일본은” “상대국에 대해” “어떠한 충실의무(fiduciary duties)도 지지 않는다”. 충실의무는 주로 주식회사나 금융기관 등 ‘다른 사람(신탁자)의 돈을 맡아 운용관리하는 자(수탁자)’가 신탁자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의 용어다. 일본은 신탁자이고 미국은 수탁자다. 트럼프 행정부는 ‘수탁 의무’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펀드 운용자나 다를 바 없다. 트럼프 측이 일본의 돈을 낭비하고 대규모 손실을 내도, 일본 정부엔 시정을 요구하거나 법적으로 문제 삼을 권리가 없다.
더욱이 이 MOU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행정적 합의에 불과하며, 국내법이나 국제법상 어떠한 권리·의무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이 MOU의 어떤 내용도 각국(미·일)의 법률과 충돌할 수 없다.”
국제법상 조약이 아니므로, 미·일 정부는 의회에 보고하거나 승인받을 필요가 없다. WTO 등 각종 국제 조약상 의무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문자 그대로 보면, ‘MOU는 별것 아니구나.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구나’라고 느낄 수도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미국은 이 조항으로 “우리 법률이 MOU에 우선한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미국은 MOU 조항을 어긴 다음에도 ‘미국 법을 지키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라고 우기면 된다. 일본은 그렇지 않다. 어차피 이번 관세 협상은 국제법에 따라 이뤄진 것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관세로 혼내주겠다’라고 하는 바람에 현대 세계사에선 당치 않은 협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초부터 이 MOU의 핵심적 구속력은 국제법이 아니라 미국의 보복 능력이었다. 결국 MOU를 위반하면, 일본은 관세 폭탄을 맞게 된다. 미국은 ‘MOU는 조약이 아니므로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된다’라며 버틸 수 있다. 미국의 힘과 글로벌 권력의 작동 방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조항이다.
■ 한국과 일본의 결정적 차이
한·미 협상의 분위기가 바뀐 것은 10월29일 오후에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였다. 회담 직후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신라 금관 모형과 함께 대한민국 최고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트럼프는 “매우 훌륭한(tremendous) 만남이었다. 무역 합의를 사실상 마무리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곧이어 열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위성락 안보실장과 김용범 정책실장에 의해 확인되었다.
김용범 실장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산 제품(자동차와 그 부품 포함)에 부과된 수입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했다. 반도체도 타이완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받기로 합의했다. 농산물 부문에서도 추가적 시장개방을 막았다.

한국의 대미 투자는 3500억 달러를 두 부문으로 나눠 시행하기로 했다. 2000억 달러는 미·일 MOU에 규정된 일본의 5500억 달러와 비슷한 방식으로 투자된다. 나머지 1500억 달러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와 관련된 부분이다.
우선 2000억 달러 부분부터 살펴보자. 이 2000억 달러에 대해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측 투자위원회와 트럼프가 투자처를 결정한다. 수익배분도 원리금 상환이 완료될 때까지 50대 50이다.
다만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연간 투자 상한을 200억 달러로 설정했다. 미국 현지 사업 프로젝트의 진척 단계에 맞춰 송금하면 된다. 이런 송금의 합계가 연간 200억 달러를 넘길 수 없도록 합의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김용범 실장은 연간 200억 달러라면 “우리 외환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라고 말했다. 한국은 제법 큰 규모의 ‘외화 자산’을 갖고 있다.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채권, 한국투자공사(KIC)가 미국 채권·주식 등으로 운용하는 자금, 산업은행 등 공공금융기관의 해외 달러 계정 등이다. 이런 외화 자산들의 운용 수익(이자와 배당)으로 “(200억 달러의) 거의 대부분을 충당할 수 있다”라고, 김 실장은 내다봤다.
예컨대 한국 내에서 원화로 달러를 대량 매입하면 원화 가치가 하락(=달러 가치 상승)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공공기관이 보유한 미국 내 주식·채권의 ‘달러 수익’을 현지에서 받아 미국 내에 다시 투자하면 한국 내의 외환시장엔 직접적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외환시장 불안이 우려되는 경우 투자금의 납입 시기와 금액의 조정을 요청할 수 있는 별도의 근거도 마련했다”라고 김 실장은 말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자의적 투자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한 것으로 자평한다. 미국 측 투자위원회가 한국의 돈을 ‘상업적으로 합리적(commercially reasonable: 원금과 약정이자를 보전할 수 있는)’인 사업 프로젝트에만 투자해야 한다는 문구를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게 한·미 MOU에 명시하기로” 합의했다고, 김용범 실장은 주장했다. 미·일 MOU엔 ‘상업적 합리성’이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또한 특정 사업 프로젝트의 수익률이 낮아서 원리금을 장기간 돌려받지 못할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50대 50의’ 수익배분 조건을 조정해서 한국의 비율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일본은 불가능한 일이다.
‘마스가’에 해당되는 1500억 달러 부문에서는 한국의 자율성이 매우 높다. 무엇보다 미국 측 투자위원회와 트럼프가 이 1500억 달러의 투자에 대해서는 개입하거나 감독할 수 없다. 한국 민간기업들과 정부가 운용·사업 주체다. 한국 국적의 민간 조선업체가 미국 현지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다시 미국에 투자한다고 치자. 한국 정부는 이 대출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다. 혹은 해외에서 빌린 달러를 미국 현지 조선 사업에 투자하고 이 사업의 수익으로 대출금을 상환하는 ‘선박 금융’ 기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 두 경우 모두, 달러가 해외에서만 순환된다. 한국 내 외환시장은 충격을 피할 수 있다.
10월29일 김용범 실장은, “무역 합의문 초안을 수일 내에 공개할 예정이며, 이와 관련된 법안도 초안 작성이 완료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 법안은 11월 중 여권이 의석 3분의 2를 점유한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헌법에 따라 국가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외 투자·관세 협정은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해당 법률이 11월에 국회에서 비준되면, 이달의 첫날(11월1일)부터 15% 관세를 소급 적용하기로 미국 측과 합의했다고, 김용범 실장은 말했다.

■ 트럼프에게서 얻어낸 또 한 가지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숙원 사업 중 하나인 ‘미 동맹국들의 방위비 분담’ 문제를 선제적으로 치고 나가며 한국의 국방비 증액 의지를 표명했다. 이와 함께 “핵추진 잠수함의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결단해달라”고 요청했다. 지금은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한국은 미국의 동의 없이 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없다. 위성락 안보실장에 따르면, 트럼프는 ‘한반도 주변 여건 변화에 따라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 후속 협의를 해나가자’고 화답했다. 또한 트럼프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라면서, “김정은이 원한다면 언제든 적극적으로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다음 날인 10월30일 트럼프는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고 밝혔다. 핵추진 잠수함은 ‘핵을 싣고 다니는 잠수함’이 아니라 ‘원자력을 동력원으로 연료 보급 없이 수개월~수년 동안 잠항할 수 있는 강력한 군사 자산이다.
경북 경주에서 일단락된 이번 한·미 협상은 비교적 ‘선방’한 외교로 평가받는 분위기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제와 안보에 미칠 영향은 여전히 그리 장밋빛은 아니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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