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댐 건설로 수몰된 문명, 그 운명을 딛고 부활한 신전
-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900㎞
- 이집트 최남단 관문인 아스완
- 풍요로운 고대문명 이룬 ‘누비아’
- 이집트 복속된 후 고왕국 통일
- 20세기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 영광의 기억 간직한 채 수몰돼
- 아스완서 룩소르까지 운항하는
- 나일강 크루즈 타고 신전들 만나
나일강은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지도상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강이다.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900㎞ 지점에 최남단의 관문인 아스완이 있다. 여행의 전형적 동선은 카이로에서 비행기로 아스완에 내려간 뒤, 나일강 크루즈로 북쪽 룩소르까지 올라오는 여정이다.

▮낯선 세계와의 연결점 ‘아스완’
아스완은 이집트에서는 적도에 가장 가까운 도시이기에, 하지 무렵이면 태양이 정수리 가까이 떠 그림자가 거의 사라진다. 고대인들은 이곳을 태양신 라(Ra)의 빛이 가장 강하게 닿는 장소로 여겼다. 또한 아스완은 붉은 화강암 산지다. 피라미드 내부 구조물, 왕릉의 석관, 신전의 기둥과 오벨리스크에 쓰인 화강암은 모두 이곳에서 채취됐다. 그 증거처럼 채석장에는 오늘도 ‘미완의 오벨리스크’가 거대한 바위에서 반쯤 분리된 채 누워 있다. 작업 중 금이 가면서 버려진 것이다. 오로지 돌과 끌, 마찰과 정렬만으로 초거대 석재를 떼어내던 수천 년 전 이집트 장인들의 모습을 이곳에서 엿볼 수 있다. 바위 아래로 구멍을 연속적으로 뚫어 ‘바닥 면’을 터널처럼 분리하던 고대의 공법 흔적도 선명하다.

가공된 석재와 조각을 북쪽 도시로 실어 나른 것도 나일강이다. 그런데 강물은 북으로 흐르지만, 바람은 대체로 남쪽을 향해 분다. 북행에는 물살을 타고, 남행에는 돛을 올려 바람을 탔다. 나일은 비옥한 범람토를 선물한 농경의 강이자,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잇는 운송의 대로였다.
하지만 나일이 언제나 길을 내주지는 않았다. 강에는 여섯 구간의 급류(카타락트)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아스완 남쪽에 자리했다. 바위가 솟아 수심이 얕아지며 형성된 급류 지대는 남쪽 세력이 나일을 타고 북상하는 데 큰 자연 장벽으로 작용했다. 서쪽의 리비아 사막,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과 홍해, 북쪽의 지중해, 그리고 남쪽의 급류라는 자연의 방벽 덕분에 이집트는 오랜 기간 외세의 침입 없이 문명을 번성시킬 수 있었다.
아스완은 단순한 남쪽의 도시가 아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문화가 맞닿는 경계이자 방어의 요충지였다. 게다가 상아 금 향료 표범가죽 등 남쪽에서 온 귀한 물건들은 누비아 방면을 거쳐 이곳 아스완으로 집결해 북쪽으로 운반되곤 했다. 아스완이 고대 이집트어로 ‘무역시장’이라는 뜻의 스웨네트로 불린 이유다. 아스완은 경계를 넘어 이집트가 남쪽의 낯선 세계와 만난 첫 번째 연결점이었던 것이다.
아스완 남단에서 오늘의 수단 북부에는 고대에 ‘누비아’라 불리던 지역이 있었다. 흔히 ‘누비아’라는 이름은 ‘금’(nbw)에서 유래했다고들 말하는데, 그만큼 금 매장량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짙은 피부의 누비아인들이 살았고, 이름 그대로 금이 유명했다. 하지만 이처럼 풍부한 자원과 문명의 누비아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누비아는 고왕국 때부터 이집트의 영향권에 들었고, 신왕국 시기에는 완전한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기원전 1100년께 신왕국이 쇠퇴하면서 역류가 시작된다. 기원전 8세기, 누비아의 쿠시 왕국이 북상해 오히려 이집트를 재통일한다. ‘흑인 파라오 시대’로 알려진 제25왕조가 이때다. 이들은 이집트 문명을 파괴하기보다 오히려 더 경건하게 복원했다. 그러나 곧 이은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다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누비아인들은 이전의 정착지였던 오늘날의 아스완 남쪽과 수단 북부로 물러났다. 어두운 피부와 곱슬머리, 강인한 체구로 묘사된 누비아인들은 단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이집트 문명의 중요한 구성원이기도 했다.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 벽화 곳곳에서 이집트인들 속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아스완 하이댐이 건설되면서 거대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수가 생겨났다. ‘현대의 피라미드’라 불릴 만큼 거대한 이 사업으로, 축복이기도 했던 나일강의 범람이 멈추어 버렸고, 5만~10만 명의 누비아인이 살던 마을과 고대 유적 역시 인공호수 안에 수몰돼 버렸다. 이때 원주지에서 이주해 만든 마을 중 하나가 ‘누비안 빌리지’다. 한때 이집트 전역을 통일해 그 문화를 번성시키던 누비아인들은 이제 작은 정착지 안에서 수천 년간 이어온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 누비안 빌리지의 벽에는 이전 고향에서처럼 푸른 하늘색, 주황빛 태양, 초승달, 악어와 낙타의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이는 단지 장식이 아니라, 수몰된 고향을 기억하는 상징의 언어다. 하지만 그들의 고유한 언어는 이제 구전으로만 남은 채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누비안 빌리지 또한 차츰 하나의 거대한 기념품 공간처럼 변모해가고 있다.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은 오히려 아스완에 있는 ‘누비안 박물관’에서만 살아남은 듯하다.
나세르 호수가 침몰시킨 것은 누비아 마을만이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의 유산인 필레 신전과 아부심벨 신전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두 신전은 국제협력으로 해체·이전해 복원됐다. 아부심벨은 두 개의 거대한 신전으로 구성돼 있는데, 큰 신전은 람세스 2세 및 라-호라크티·아문·프타 신에게, 작은 신전은 네페르타리와 하토르 신에게 봉헌됐다. 필레 신전은 본래 이시스 여신에게 바친 성소로, 필레섬이 수장되면서 아길키아 섬으로 옮겨졌다. 이시스는 사랑·지혜·부활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죽은 남편 오시리스를 되살리고 아들 호루스를 지켜낸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시스에게 바쳐진 신전이 새로운 섬에서 되살아난 것이 마치 어머니 여신의 부활처럼 다가온다.
▮아스완~룩소르 나일강 크루즈
이제 아스완을 떠나 룩소르로 향하는 나일강 크루즈에 승선해보자. 남쪽 아스완을 출발한 배는 강의 굽이마다 신들의 세계를 지나 북쪽 룩소르로 향한다. 그러다 나일강의 흐름이 크게 휘도는 절벽 위에서 콤옴보 신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신전은 특이한 외형과 상징을 담고 있다. 기원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건설된 후기 이집트 신전인 이곳은 중앙 축선을 기준으로 좌우가 거의 완벽하게 대칭 구조를 이룬 채 두 신을 동시에 모시고 있다. 신전은 입구부터 제단 성소 회랑까지 모두 두 개의 평행한 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서쪽은 물과 풍요와 파괴의 힘을 모두 상징하는 악어신 소벡에게, 동쪽은 하늘과 빛을 상징하면서 왕권의 수호신인 매의 신 호루스에게 바쳐졌다. 이 두 신은 서로 반대의 힘을 상징하는 듯하지만, 이집트인들은 그 대립을 하나의 조화로 본 듯하다. 신전의 부조에는 악어와 태양, 그리고 의술 도구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 이곳은 단순한 제의의 장소가 아니라, 생명과 치유의 신앙이 깃든 곳이었다. 또한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악어가 신의 상징으로 길러졌는데, 신전 인근의 ‘악어 박물관’에서는 수많은 악어 미라를 볼 수 있다.
배가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하면, 나일 서안에 웅장하게 서 있는 에드푸 신전을 만난다. 높이 약 36m의 거대한 탑문이 여행자를 맞이하는 이곳은 매의 신 호루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그가 혼돈의 신 세트를 물리치고 빛과 질서를 회복한 신화의 현장이다. 이집트 벽화 곳곳에서 목격되는 거대한 매의 부조가 바로 이 호루스 신이다. 그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신이자 정의를 세우는 수호신이다. 에드푸의 신전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완성된 후기 신전이지만, 그 구조와 정신은 여전히 신왕국 시대의 장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스완에서 시작된 나일강의 물결은 고대 이집트의 신앙과 자연, 그리고 후손들의 욕망을 담은 채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잠길 운명이었으나 새롭게 부활한 아부심벨과 필레 신전을 만나고, 물과 태양의 조화 속에 생명과 죽음의 연속성을 품은 콤옴보 신전을 거쳐, 정의와 빛의 승리를 상징하는 에드푸 신전을 들렀다. 문명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형태를 바꾸어 끝없이 부활할 뿐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의 결정체인 룩소르로 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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