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화분 하나가 고립청년을 세상 밖으로···“책임감을 연습합니다”

류인하 기자 2025. 11. 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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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매년 은둔·고립 청년 등에 반려식물 보급
“은둔·고립청년, 식물에 자신 투영하는 경우 많아”
다시 고립되지 않도록 자격증 취득 등 연계운영
그린코디네이터 자격을 갖고 있는 은둔·고립청년과 경력단절여성들이 지난 8일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공원에서 열린 ‘노원의 다시쓰는 지혜’ 행사 체험부스에서 아이들에게 화분꾸미기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류인하 기자

“보통 1주일에 한 번 물을 주라고는 하는데, 사는 환경이 달라지니까요. 일주일에 한 번씩 나무젓가락으로 흙을 손마디만큼 찔러보고, 흙이 묻어나지 않으면 그때 종이컵 반컵 만큼만 물을 주시면 돼요.”

그린코디네이터 A씨(33)가 지난 8일 화분만들기 체험에 참여한 꼬마(6)와 할머니에게 물주는 방법을 설명했다.

색모래로 화분 밑을 꾸미고 흙을 켜켜이 쌓아 테이블야자 화분이 완성됐다. A씨는 “이 식물의 이름이 있지만 어린이가 직접 이름을 지어줘도 돼요”라고 말했다. ‘남은 흙을 가져가도 되겠느냐’는 할머니의 요청에 김씨는 미소를 지으며 “네, 들고 가셔도 돼요. 봉투에 같이 싸드릴게요”라고 답했다.

A씨는 이날 서울 노원구 경춘선숲공원에서 열린 ‘노원의 다시쓰는 지혜’ 지역행사에 사회적 기업 ‘우리애그린’ 소속 그린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그는 한때 10년간 집 안에만 머물던 고립·은둔청년이었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는 정해진 길에 맞춰 공부했지만, 졸업 이후의 삶은 오롯이 그의 의지대로 만들어가야 했다. 그것이 A씨가 집 안에 숨어든 이유가 됐다.

“엄마가 마당에 장미를 심어보라며 주셨어요. ‘설마 꽃이 피겠어’라며 길렀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자랐어요.”

잘 자란 장미는 A씨가 세상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됐다. 그는 용기를 내 서울시 청년 기지개센터에 고립청년으로 등록했다. 집 밖으로 나와 약 8주간의 ‘그린코디네이터’과정을 이수했다.

“저는 제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해서 고립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식물을 키우며 책임감을 연습하게 됐어요. 고립청년으로 등록하는 과정 자체가 어찌보면 수치스러운 일인데, 저는 그 덕을 정말 잘 본 사람이라 생각해요.”

이날 화분만들기 행사에는 A씨를 비롯한 3명의 고립·은둔청년과 2명의 경력단절여성이 참여했다. 한때 화분만들기 체험신청자가 몰리며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화분만들기 체험을 한 박모씨(67·월계동)는 “자꾸 설명을 잊어버려서 계속 묻는데도 직원들이 참 친절하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 2017년부터 고립·은둔청년을 대상으로 반려식물 보급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식물 통해 고립된 공간에서 나아가 사람과 소통

단순히 고립된 사람들에게 식물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다시 익힐 기회를 주려는 취지다.

지난해에만 총 500명의 고립·은둔청년이 반려식물을 보급받았다. 노동취약계층, 노인·장애인을 모두 포함하면 7548명이 반려식물을 받았다. 올해는 약 8000명을 대상으로 반려식물 보급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9일 서울시 관계자는 “반려식물을 받은 은둔·고립청년을 대상으로 원예치유프로그램 참여여부를 지속적으로 물어보며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반려식물을 받은 300명을 대상으로 원예치유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원예치유프로그램은 일반과정 뿐만 아니라 민간자격과정까지 연계된다. 은둔·고립청년의 외부활동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시는 내년에 열리는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도 은둔·고립청년이 적극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

이날 현장을 관리한 이정하 ‘우리애그린’ 사업지원팀 팀장은 “은둔·고립청년들은 식물에 자신을 투영하는 경우가 많아 식물을 가져가 키우게 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며 “청년들이 다시 고립되지 않도록 일자리 창출로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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