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혼합복식의 침묵을 깨라." 박주봉 감독, 한국 배드민턴에 새 숨결
- 금빛 전통의 몰락, ‘양수겸장’ 시대의 종언
- 대표 선발 시스템 보완 절실, 채유정 은퇴의 이면
- 대표팀 코치진 확대와 혼합복식 전문 선발, 숲을 보는 리더십
- 김재현–정나은의 약진, 희망의 싹이 움튼다.

배드민턴 혼합복식 세계랭킹에서 한국 선수를 찾기는 쉽지 않더군요. 세계배드민턴연맹(BWF) 홈페이지에 들어가 처음 발견한 이름은 세계 32위 이종민(삼성생명)-채유정 조였습니다. 하지만 채유정이 최근 은퇴했기에 사실상 의미 없는 랭킹이죠. 다시 수없이 페이지 다운을 반복한 끝에 겨우 '태극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세계랭킹 80위 기동주(인천국제공항)와 정나은(화순군청)이었습니다. 현역 한국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랭킹이 8위도 아니고 80위라니요. 잠시 눈을 의심했습니다.
한국 배드민턴은 국제무대에서 대표적인 효자 종목인데 혼합복식은 효자 가운데 효자로 불릴 만했습니다. 올림픽에 혼합복식이 처음 정식종목이 채택된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길영아와 김동문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 대회 은메달은 박주봉과 나경민이었습니다. 한국 선수끼리 올림픽 우승을 다투는 집안싸움을 벌인 겁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이용대와 이효정이 시상대 꼭대기에 섰습니다. 지난 2004년 파리올림픽에서는 김원호와 정나은이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2000년대 초반 현재는 부부가 된 김동문과 나경민이 세계랭킹 1위를 질주하며 주요 국제대회 우승을 밥 먹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어디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 원인은 무얼까요. 과거에는 남자복식 또는 여자복식을 하는 선수들이 혼합복식을 겸업했습니다. 박주봉은 이미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김문수와 남자복식 금메달을 합작했습니다. 특히 박주봉은 1993년 세계 혼합단체전을 끝으로 은퇴한 뒤 신설된 혼합복식 금메달에 도전하는 투혼을 보였습니다.


김동문 역시 혼합복식 우승에 이어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는 하태권과 금메달을 추가해 올림픽 2관왕이라는 위업을 이뤘습니다. 김동문은 남자복식과 혼합복식에서 모두 세계 최강으로 군림한 겁니다.
이용대는 어떤가요. 그 역시 혼합복식뿐 아니라 정재성, 유연성과 짝을 이룬 남자복식에서도 셔틀콕 제왕이라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이런 '양수겸장'의 전통은 서승재와 김원호에게도 이어지는 듯했으나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파리올림픽을 끝으로 서승재와 김원호는 남자복식에만 전념하게 됐습니다. 선택과 집중 덕분이었을까요. 한국 선수로는 9년 만에 남자복식 세계랭킹 1위가 된 서승재와 김원호는 지난달 말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하며 시즌 9관왕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그렇다고 두 종목에서 모두 최강의 자리를 지킨 배드민턴 선배들이 서승재와 김원호에게 "나 때는 말이야"라고 뭐라 하긴 힘든 상황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배드민턴 추세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배드민턴협회 임방언 전무(정관장 감독)는 "예전과 달리 요즘 선수들은 국가를 불문하고 체력 부담 등을 이유로 2종목 출전을 꺼리는 분위기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 왜 한국만 유독 혼합복식 전력이 급격하게 약화한 걸까요. 기존 대표 선발 제도가 혼합복식 전문 선수 육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한국 배드민턴 대표팀은 복식 선수를 선발한 뒤 그 인원 중에서 남자(여자)복식과 혼합복식을 같이 하는 시스템입니다. 혼합복식에서 세계 정상급 기량을 펼친 채유정이 최근 전격적으로 은퇴한 이유도 대표팀에서 마땅한 남자 파트너를 찾기가 더 이상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채유정은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혼합복식 종목이 없다. 그래서 여자복식으로 선발전을 뛰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긴 시간을 혼합복식 선수로 쭉 달려왔다. 여자복식으로 도전하기에는 너무 힘든 여정이 될 것 같았다. 그럴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포기하기로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나마 올해부터 한국 대표팀을 이끄는 박주봉 감독을 중심으로 혼합복식 강화를 위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건 다행스러운 부분입니다. 안세영과 김원호-서승재를 월드스타로 끌어올린 박 감독은 20년 가까운 일본 대표팀 사령탑 시절 혼합복식의 전력을 급성장시킨 경험까지 있습니다. 일본 배드민턴 혼합복식은 아시아에서도 약세를 면치 못했으나 박 감독의 지도력에 힘입어 최근 올림픽에서 2회 연속 동메달리스트를 배출했습니다.
박주봉 감독은 "일본에서 혼합복식을 꺼리는 분위기가 많았다. 하지만 혼합복식 유망주를 주니어 레벨에서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투자했다. 전담 코치까지 배정하면서 서서히 효과를 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박 감독은 지난달 부산 전국체전 기간에는 혼합복식 선수 육성을 위한 대표 선발 제도 개선을 주장하며 채유정 사례를 언급했습니다. 박 감독은 "혼합복식도 엄연히 배드민턴 5개 종목 가운데 하나다. 방치 상태가 계속된다면 진정한 배드민턴 발전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라고 충고했습니다.
하지만 대표팀에 혼합복식 전문 선수를 늘리는 방안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표팀 전체 인원수가 확대되지 않는다면 기존 남자 복식이나 여자 복식 선수가 줄어들 수 있어서입니다. 배드민턴 실업팀들이 최우선으로 여기는 국내 대회인 전국체전의 경우 단체전에 혼합복식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자(여자)복식에만 치중하는 겁니다.
전북 익산 원광대 문화체육관에서 열리는 코리아마스터즈 배드민턴 선수권에 참석한 김동문 회장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내년부터 대표선발전에 혼합복식 전문 선수를 선발하기로 했다"면서요.
이처럼 오랜 세월 해외에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리다 돌아온 박주봉 감독은 한국 배드민턴 발전을 위한 대계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할 시기라는 겁니다. 선수를 키우는 데는 우수한 지도자가 필수입니다. 그래서 박 감독은 한국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7명의 코치진을 9명까지 늘렸습니다. 대한체육회 지원 코치 1명에 대한배드민턴협회 지원 코치 1명이 추가된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10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박 감독은 "남녀 단식, 남녀 복식, 혼합복식 등 5개 종목마다 2명의 코치가 있어야 코칭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한배드민턴협회의 살림이 펴져야 대표팀도 힘을 낼 수 있다는 게 박 감독의 지론입니다. 틈나는 대로 선수들에게 팬과 후원업체의 소중함과 함께 훈련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폰서 관련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표팀 선수들은 라켓, 신발 등에 대한 개인 협찬 허용에 따라 거액의 계약금을 챙기며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개인 에이전트까지 둔 선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적으로 코치진의 처우는 여전히 개선될 부분이 많습니다. 박 감독이 틈나는 대로 후원업체에 코치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박 감독은 코치들에게도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대표팀 전력 극대화에만 치중하며 훈련 외적인 부분에서는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박 감독의 이런 열정에 선수들도 힘을 더 냈을까요. 한국은 8일 열린 준결승에서 남자복식 이종민(삼성생명)-왕찬(국군체육부대), 여자복식 김소영-이서진(이상 인천국제공항) 혼합복식 김재현(요넥스)-정나은(화순군청)이 나란히 결승에 올랐습니다. 특히 김재현과 정나은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이번 대회에서 탄탄한 팀워크를 발휘해 혼합복식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올랐습니다.
혼합복식의 명맥을 잇기 위한 박주봉 감독의 노력은 단순한 종목 강화를 넘어 한국 배드민턴 전체의 체질 개선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성기를 향해 셔틀콕이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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