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용 기름으로 라면을?' 분노 쏟은 언론… 최악의 '검찰 받아쓰기'

금준경 기자 2025. 11. 9. 02:5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지 강조한 라면 출시에 재조명 받는 1989년 우지파동
검찰 일방적 발표, 즉각 반응하며 공포 부추긴 언론
8년 만에 무죄 판결 받았지만 걷잡을 수 없는 피해

[미디어오늘 금준경 기자]

▲ '삼양1963' 제품 홍보 이미지 갈무리.

'우지'(牛脂·소기름)라는 표현이 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삼양식품이 '우지'를 강조한 '삼양1963'을 출시하면서다.

삼양식품 '삼양1963' 라면 신제품 발표회에 김정수 부회장이 직접 무대에 올라 작심 발언을 했다. 그는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여론 속에서 공업용 우지라는 단어가 우리를 무너뜨렸고, 공장에 불이 꺼지고 수많은 동료가 떠나야 했다”며 이 제품으로 창업주의 한을 풀겠다고 했다. 삼양식품은 유튜브에 <무죄 판결 받은 라면이 돌아옵니다> 광고 영상을 냈다. 당시 삼양식품 직원이 '우지파동' 사태 때를 떠올리며 “지금도 그 생각하면 분하죠. 억울하죠”라고 한다.

투서→검찰 발표→언론 받아쓰기

사건의 발단은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양식품 등 몇몇 기업이 식용으로 써선 안 되는 우지를 제품에 사용한다는 익명의 투서가 검찰에 접수됐다. 당시 검찰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고 11월3일 “비누나 윤활유 원료로 사용하는 공업용 수입 소기름을 사용해 라면 등을 만들어 시판했다”고 언론에 발표한다.

1989년 11월3일 MBC '뉴스데스크'의 엄기영 앵커가 전한 첫 소식은 이랬다. “불량식품이 이제는 허름한 뒷골목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내로라하는 라면과 마아가린 제조업체가 비누나 만드는 공업용 쇠기름을 가지고 라면과 마가린을 만들어 팔다가 검찰에 붙들렸습니다. 갑자기 속이 좀 이상해지는 있어서는 안 될, 뉴스 사회부 김원태 기자가 보도합니다.”

신문에서도 강도 높은 비판이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1989년 11월5일 <전국에 라면쇼크> 기사를 통해 “국민소득이 4000달러를 넘어선 지금까지 후진국형인 부정불량식품이 판을 치고 있다”며 온 국민이 개탄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식품살인' 기획 연재 기사를 낸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11월8일 <공업용 우지 응징 마땅> 기사에서 “아무리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된 기업가들이라 할지라도 이것만은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했다.

▲ 1989년 11월5일 조선일보 지면 갈무리. 사진=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공업용' '비식용' 단어는 마치 그간 먹어온 라면이 결코 먹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는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89년 11월5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사태가 불거진 다음 날에도 TV에 삼양라면 광고가 나오자 방송사에 시청자 항의가 빗발쳤다. 당시 삼양라면은 미국에서 우지를 수입해 판매했는데 미국에선 사골을 먹지 않기에 '공업용', '비식용'으로 분류됐다는 사실은 간과됐다.

뒤늦은 판결… 걷잡을 수 없는 피해

우지라면은 무해하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때는 1997년, 우지파동 후 8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검찰이 수사를 되짚을 순간은 많았다. 사건 직후 삼양식품은 “우지 수입 단가가 팜유 수입가보다 톤당 100달러가 비싼데도 우지를 썼던 것”이라며 “팜유를 비롯한 식물성 유지들도 원유 상태에선 비식용”이라고 반박했지만 검찰은 수용하지 않았다.

우지파동 직후 보건사회부는 우지가 무해하다고 판정을 내렸고, 이후 구성된 정부 식품위생검사소위원회 조사 결과도 같았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를 강행했다. 언론은 이를 '공방'과 '논쟁'으로 주로 다루면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다.

▲ '삼양1963' 제품 홍보 이미지 갈무리.

삼양식품은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사건 직후 3개월 간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1000여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게 됐다. 유통 중인 제품 전량 회수에 나서면서 100만 박스가 폐기됐다. 삼양식품의 라면 판매량도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삼양식품이 우지파동 후 점유율 1위를 빼앗겼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사건 4년 전부터 농심에 점유율이 추월당했고 사건 발생 전년도인 1988년 기준 농심의 점유율은 54.1%, 삼양식품의 점유율은 26%로 차이가 큰 상황이었다.

제2의 우지파동, 반복된다

우지파동 이후에도 1998년 포르말린 통조림 사건, 2004년 불량만두 사건에서 언론이 당국의 발표를 받아쓰면서 공포를 유발하고 피해를 키우는 상황이 반복됐다.

2005년 10월21일 미디어오늘은 <의혹만 증폭시키는 악순환 끊어야> 기사를 통해 '유해식품보도'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유형으로 1. 정부발표 받아쓰기 2. 자극적 표현·논란 확산 3. 업계 소비자 반응 중계 4. 정부책임론 등장 5. 공방·갈등 중심의 보도 등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상황 전달이 불가피하더라도 후속으로 전문가 중심 취재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