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의 목 대신 샴페인병 목을 겨눈 칼날…축배의 의식, 사브라주는 어떻게 시작됐나 [전형민의 와인프릭]
순간의 소리가 있습니다. 강철로 만들어진 칼날로 샴페인의 병목을 자르는 순간, 금속과 유리가 부딪히는 짧고 강렬한 파열음. 그 한 점의 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터지는 순간 거품은 허공으로 솟고, 냉기 어린 샴페인은 새벽의 숨결처럼 흩어집니다. 동시에 그 모든 장면이 시간이 잠시 멈춘듯한 짜릿함이 몸을 휘감습니다.
곡선의 군도, 사브르(sabre·영어로는 세이버)로 샴페인의 병목을 쳐서 여는 방식, 사브라주(sabrage)는 바로 그 찰나의 예술입니다. 단순하게 병을 열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감정과 리듬으로 완성되는 와인을 여는 가장 극적인 방식이자, 동시에 가장 고요한 방식이죠.
와인 애호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완벽한 사브라주의 순간. 그 아름다운 행위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어쨌든 사브라주의 순간, 적을 베던 칼은 더 이상 전쟁의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말 위에서 축배를 든다는 것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브라주 행위 자체가 곧 전쟁이 끝났다는 축배의 상징이자 피비린내 대신 거품으로 흩어지는 해방의 상징이됐습니다. 전쟁의 잔재에서 태어난 평화의 의식인 셈입니다.
칼날로 병목을 때려 깨뜨리는 그 순간은 단순한 묘기가 아닙니다. 당시에 처음 사브라주를 하던 그들은 명확하게 알지 못했겠지만, 그것은 물리와 감각, 정확함과 우연이 맞닿은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샴페인 병 속의 압력은 6기압. 자동차 타이어의 3배,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의 6배에 달하는 공기가 압축돼있습니다.
그 긴장된 공간을 칼 한 번으로 여는 일은 단순하게 힘으로 때려부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병목의 솔기를 따라 칼이 미끄러지듯 오르고, 병목 입술의 이음매에 닿는 찰나의 순간. 손목의 각도, 칼의 속도, 병의 온도와 거품의 움직임까지 모두 하나의 리듬으로 맞아떨어져야 병목이 깔끔하게 떨어져나갑니다. 힘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죠.
적정 온도는 섭씨 3도에서 5도. 너무 차면 병이 수축해 깨지지 않고, 너무 따뜻하면 기체가 팽창해 병목이 아닌 병 자체가 터져버립니다. 병을 45도로 기울이고, 손은 흔들림 없이 병을 잡아야 합니다. 병의 곡선을 따라 칼끝이 빠르게 이동하고, 병의 입술에 닿는 순간 손목을 미세하게 튕겨서 순간적인 힘을 극대화 합니다.
칼로 병을 잘라내는 것이 아닌, 병속 6기압의 압력이 스스로 가야할 길을 열어주는 일입니다. 병 내부의 압력과 취약한 이음새에 사브르를 활용해 순간적으로 충격을 주고, 그 압력으로 인해 병의 윗부분이 분리되어 날아가는 원리, 칼은 단지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죠.
여기서 병목이 절단될 경우 유리가루가 음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헛소리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6기압의 압력이 바깥으로 쏟아지는데, 가볍디 가벼운 유리 가루가 그 압력을 거슬러서 병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비행기가 태풍을 관통해 비행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죠.

같은 해 9월 5일에는 스위스 멘드리시오에서 지역 응급 처치 기금 마련을 위한 또 다른 흥미진진한 사브라주 행사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는 487명이 동시에 샴페인을 사브라주 하는 가장 많은 인원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습니다. 일종의 퍼포먼스인 셈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브라주는 관객을 위한 쇼가 아니라, 와인을 향한 존경의 표현입니다. 발효와 숙성, 그리고 최소 수년에 달하는 기다림의 시간을 담은 병을 예술로 여는 행위라고 봐야합니다. 병을 연다는 것은 단순히 마시는 준비가 아니라, 시간을 해방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프랑스의 ‘콩프레리 뒤 사브르 도르(Confrérie du Sabre d’Or·샴페인 사브라주 협회)’는 이를 명예로운 개봉의 예술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샴페인을 전통적인 방법으로 여는 예술과 예절을 보존·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인데요. 사브라주 의식을 미사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샴페인을 사브라주하는 용도의 사브르가 설계되고 제작되기도 합니다. 사브라주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검을 샴페인 소드라고 하는데요. 어떤 검들은 아주 짧은 단검 길이의 칼날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사브라주의 원리에 따르면, 타격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칼날은 무딘 게 차라리 낫다고 합니다.

칼이 지나가고, 병목이 떨어지고, 거품이 솟고, 냉기가 흩어지고, 종래에는 향이 피어납니다. 폭발 후 고요함이 찾아오고, 고요 속에서 와인은 잔으로 흐릅니다. 협회는 사브라주 순간의 정확함이야말로, 와인을 향한 최상의 예의라고 강조합니다.
어쩌면 사브라주는 와인을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흙과 햇빛과 인간의 노동이 시간 속에서 숙성된 기록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식이 아닐까요?
“Le sabrage n’est pas un geste, c’est un hommage.”(사브라주는 동작이 아니라, 경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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