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록 밴드 AC⚡︎DC의 Est. 1973 티셔츠. 밴드 결성 연도인 1973년을 의미한다. 37달러다. 이 돈이면 유*클로 에어리즘을 몇 벌 사겠다는 나쁜 말은 하지 말자. 옷이 아니라 공식 굿즈다. [ACDC 홈페이지]
명사. 1. established(설립하다)의 축약어【예문】“몇 년 째 단골이에요”라는 블로그 리뷰를 보고 음식점을 찾아갔다. 간판에 적힌 est. 2025를 보며 깨달았다. 아, 올해 개업했구나.
설립하다(established)의 줄임말이다. 정확히는 ‘established in’을 축약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est. 19XX’ 같은 방식으로 표기하는데 브랜드 혹은 기업명에 이어 표기해 언제부터 설립됐는지를 알린다. 신스(since)도 같은 의미로 쓴다.
2025년부터 유부남·유부녀예요! 나름 귀여운 결혼 기념품 ‘웨딩 코스터(컵 받침)’. [masonjarclayton.com]
est.는 단 세 글자로 브랜드의 장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수많은 브랜드가 새로 생겨나고 그만큼 없어진다. 2023년 정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 창업기업의 66.2%는 5년 내 폐업했다. 세 곳 중 한 곳만 겨우 살아남은 셈이다. 기간을 백년 정도로 넓혀 보자. 산업화의 역사가 짧은데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국가의 존속마저 위협받는 상황을 겪은 탓에 ‘100년 장수 기업’이 드물다. 두산그룹(1896년 설립)과 동화약품(1897년 설립), 강원여객자동차(1921년 설립) 등 16개 사에 불과하다. 100년 이상 존속한 기업이 가장 많은 국가는 일본(4만5284개)로 미국(2만1822개), 독일(5290개), 영국(1984개)이 뒤를 이었다.¹
살풍경한 브랜드 적자생존의 시대에, 늙은 기업은 그 자체로 강자(强者)의 방증이다. 충청도 빌런의 정수를 보여준 영화 ‘짝패’(2006)에서 악역 장필호가 남긴 말을 음미해보자. 구수하고 느긋한 억양도 함께 떠올리면 좋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고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est.는 세월을 견딘 생존자의 자부심이다. 자랑해도 좋다. 물론 돌잔치도 아직 먼일인 생존자 인턴이라면, 사용은 자제하자.
¹ 하나금융연구소, 2025년, 100년 기업의 조건 보고서 인용. 일본은 2024년, 미국·독일·영국은 2022년 기준.
만화 ‘골든 카무이’에 등장하는 히지카타 토시조. “잘 들어라, 애송이들아. 이 시대에 늙다리를 보거든 ‘생존자’라 생각해라.”라는 명대사로 유명하다. [슈에이샤·대원씨아]
모든 언어는 경제성을 좇는다. 사람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에 있어 시간과 노력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ㄳ(감사합니다), 스벅(스타벅스), 사바사(사람 바이 사람),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같은 구어체는 물론이고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이나 빚투(빚내서 투자)처럼 세태를 반영하는 신조어는 (언어적으로 보수적인) 언론 기사에도 침투한다. 정말 별다줄(별걸 다 줄이네).
est. 같은 축약어도 결국 경제성을 지향하는 언어의 천성을 보여준다. 특히 영미권 기업과 비즈니스를 하게 되면, 줄임말의 향연과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만 좀 줄여’라고 말하고 싶지만, 슬프게도 답답한 쪽도, 을(乙)도 이쪽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알아두자.
영어 줄임말 쉽지 않다. 중간중간 WiFi 같은 함정 카드가 있긴 하지만 여하튼 그렇다. 참고로 AIR는 인도 국영 라디오 방송사인 올 인디아 라디오의 약자란다. [THE RISE OF HOPES 유튜브]
TBD(To Be Determined·To Be Decided)는 ‘미정’이란 뜻이다. 직역하자면 앞으로 결정할 일이란 의미이지만,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TBC(To Be Confirmed)는 미확인·미확정을 뜻한다. 대략적으로 가닥은 잡혔는데, 최종 확정이 나지 않았거나, 상세한 내용에 대한 추후 확인이 필요한 경우에 쓴다. TBA(To Be Announced)의 의미는 발표 예정·추후 공지 예정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정해지거나 결론 나지는 않았지만 곧 알려주겠다는 의미로 쓴다. 업무의 진행 정도를 보자면 TBD(아직 정해진 바 없음)→TBA(나중에 알려줌)→TBC(거의 정해졌는데 일단 기다려 봐) 순이다.
FYI(For Your Information)도 있다. 당신을 위한 정보, 즉 ‘당신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니까 알아두시죠’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줄여도 너무 줄이는 거 아니니. COB(Close Of Business)는 업무 종료 시간을 의미한다. by COB Friday이라고 하면 ‘금요일 업무 종료 시간까지’ 되시겠다. 금요일 오후 5시 59분에 이메일 보내놓고 “김 대리, 지금 보낸 자료 확인해서 월요일 아침에 보고서 하나 부탁해”라고 말하는 부장도 COB는 지킨 셈이다. 물론 근로기준법 제52조 제1항과 동법 제7조, 동법 제76조의2를 어긴 어엿한 직장내 괴롭힘이지만.
아이돌 그룹의 노래 제목으로 익숙한 ETA(Estimated Time of Arrival)는 도착 예정 시간을 의미한다. 교통·물류·항공 분야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문자나 채팅 등에서도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노래 제목으로 등장한 바 있는 ETA도 자주 사용하는 영어 줄임말이다. 도착 예정 시간이란 뜻으로, “What‘s your ETA?(언제쯤 도착해?)” 형태로 사용한다. [하이브]
평소 별 위화감 없이 쓰는 영문 축약어 중엔, 그 원형을 알고 나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은 경우가 많다.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은 라틴어다. AM(오전)·PM(오후)은 라틴어로 정오 이전을 뜻하는 안테 메리디엠 Ante Meridiem과 정오 이후를 의미하는 포스트 메리디엠 Post Meridiem의 줄임말이다. 역사책에 연도 앞에 붙는 AD(서기西紀)는 라틴어 안노 도미니 Anno Domini², BC(기원전)는 영어 Before Christ의 준말이다. 사람 헷갈리게 AD는 연도 앞에, BC는 뒤에 붙는다. 요즘 들어서는 종교 중립적인 CE(Common Era·서기)와 BCE(Before Common Era·기원전)로 대체되는 추세다.
² 수도사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우스가 6세기경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서력기원(西曆紀元) 도입을 주장하며 만든 표현이다. 라틴어 Anno Domini는 ‘주님의 해年로부터 in the year of our Lord’를 뜻한다.
1BC와 AD1 사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실지니. 항상 헷갈리지만, A로 시작하니 먼저, B로 시작하니 뒤로 - 이렇게 외워보자. [www.calendarr.com]
No.1을 자연스럽게 ‘넘버원’으로 읽었다면, 숫자·번호를 뜻하는 영어 넘버(number)의 철자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어라, o가 어디서 튀어나온 건가 싶다. 숫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누메로 numero, 여기에 o가 있었다. 유래가 이렇다 보니 ‘넘버’는 언어별로 표기법이 다르다. 샤넬의 대표 향수 제품 ‘넘버 파이브’는 N°5라고 표기하는데, 프랑스어에서는 No에서 o를 윗첨자 °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에서는 №라고 적는다. 참고로 러시아어 문자에는 N이 없어서, 개별 특수문자 형태로 묶여있다. 이탈리아어에서는 n.이나 nº로, 아주 드물게 Nͦ로 쓰는 경우도 있다. 독일어로는 Nr. 네덜란드어에서는 nr.로 표기한다.
전 애인·전 남편·전 부인 따위를 지칭할 때 ‘전前 상태를 의미하는’ 접두사 ex- 혹은 명사 ex 역시 라틴어가 시발점이다. 라틴어 엑스ex는 ‘~밖으로’ ‘~로부터’를 의미하는데, 영어 접두사 역시 라틴어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본다.
샤넬의 대표 향수 제품 N°5. 1921년 가브리엘 샤넬이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에게 여성용 향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뒤, 5번째 샘플을 선택하면서 넘버 파이브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오 드 빠르펭 제품은 1978년 조향사 자크 뽈쥬가 재해석한 제품이다. [샤넬]
지인이나 유명인의 사망 소식에 ‘고이 잠드소서’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R.I.P는 원래 라틴어 레퀴에스카트 인 파체 Requiescat In Pace의 줄임말로 ‘그/그녀가 평안히 쉬기를’ 이란 의미의 중세 기독교 장례 기도문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별생각 없이 R.I.P라는 말을 써오던 영어권 사용자들이 대충 이 뜻 아닐까? 라면서 사후에 꿰맞춘 표현이 Rest In Peace이다.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단어나 약어에 의미를 추가 부여하는 걸 역두문자어(逆頭文字語·백크러님 backronym)이라고 한다. 두문자어(애크러님 acronym) 앞에 ‘뒤 back·반대 backward’를 합성한 것. 암기과목 시험공부 할 때 말도 안 되는 줄임말 만들어서 필사적으로 외운 것도 역두문자어다. 대통령 측근 등을 묶은 신조어(고소영·성시경), 잠실 아파트 대장주(엘리트) 등 일상과 기사 속에서도 꽤 자주 등장하는 편.
학술 논문이나 역사책, 박물관 유물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ca.는 주로 연도 앞에 붙는데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을 때 ‘약’ ‘대략’ ‘~경’의 의미로 쓴다. 라틴어 키르카 circa를 줄인 것으로 ca. 외에도 c.나 cca.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 밖에 기타 등등을 의미하는 etc.(엣 케테라et cetera)와 예를 들 때 사용하는 e.g.(엑셈플리 그라티아 exempli gratia), 논문에서 누구누구 외 여러 명을 표현하는 et al.(엣 알리이et alii)도 모두 라틴어에 빚을 지고 있는 표현이다.
우리 언어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라틴어이지만, 익히기 어려운 언어다.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파이튼)이 만든 영화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1979)의 한 장면. 해당 신에서는 주인공 브라이언이 반(反)로마 구호인 “로마인들은 집으로 돌아가라”를 라틴어로 쓰려는데, 로마군 장교가 문법 오류를 바로 잡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거의 라틴어 가정교사 수준. [HandMade Fil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