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막내 아들이 떠났어요”...억만장자 부부가 슬픔 잊으려 만든 ‘세상에 없던 집’ [슬기로운 미술여행]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5. 11. 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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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미술여행 - 42] 엑상프로방스 샤토 라 코스트

엑상프로방스를 떠나 2시간이 넘게 버스를 타고 달려 니스에 도착했습니다. 엑상프로방스는 우스울 정도로 햇살이 뜨겁더군요. 니스에서는 마티스 미술관과 샤갈 미술관을 찾았지만, 볼품없는 두 미술관보다는 완행버스를 타고 다녀온 생폴드방스의 매그 재단 미술관이 더 인상 깊었습니다.

언덕위에 지어진 그림 같이 예쁜 마을 생폴드방스 ©김슬기
막내 아들을 잃고 지은 숲속의 미술관
칼더와 호안 미로 등을 품고 있는 매그 재단 현대 미술관의 조각 정원. ©김슬기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예쁜 마을 생폴드방스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울창한 숲속에 매그 재단이 만든 미술관이 숨어 있습니다. 36도의 폭염에 언덕길을 걸어 미술관에 이르는 길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조각 공원과 카페를 거니는 귀여운 고양이를 보는 순간, 마음이 녹아내리더군요. 오지 않았다면 후회를 했을 법한 미술관이었습니다. 매그 재단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예술 애호가 부부와 친구 예술가들이 한마음으로 만들어낸 놀라운 미술관입니다.

이 숲속의 미술관은 매그 부부와 친구들이 만든 미술관입니다. 에메 매그(Aimé Maeght·1906-1981)는 가난한 철도 노동부의 아들이었습니다. 미술을 공부해서 칸에서 작은 판화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죠. 어느날 피에르 보나르가 판화를 대거 주문하면서 그는 갤러리스트로 제2의 삶을 살게 됩니다. 아내 마그리트와 꾸려나간 화랑은 승승장구했죠. 좋은 예술을 보는 탁월한 안목과 온화한 성품 덕분이었습니다.

파리와 바르셀로나에 갤러리를 운영하며 마티스, 샤갈 등 남프랑스 예술가들의 작품을 팔며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던 1953년 비극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막내아들 베르나르가 11세의 어린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죠. 낙담한 부부에게 조르주 브라크는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예술의 집’을 만들어보라고 조언합니다.

“여기서 무언가, 목적이 없는 무언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빛과 공간을 가진 이 곳에서 조각과 회화를 전시할 수 있게 무언가를 하세요. 내가 도와줄게요.” - 조르주 브라크

1만3000여점의 컬렉션을 가지고 미술관을 짓기로 마음먹은 부부는 미국에 가서 솔로몬 R. 구겐하임 재단, 반스 컬렉션, 필립스 컬렉션 등을 둘러보고 돌아와 부푼 마음을 먹게 됩니다. 친구이자 부부가 발굴하다시피 한 조르주 브라크, 호안 미로,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들은 매그 재단(La Fondation Maeght)의 설립부터 함께 했죠. 마찬가지로 친구였던 문화장관 앙드레 말로의 전폭적 지원 아래 1964년 7월 26일 매그 재단 현대 미술관은 프랑스 최초의 사립 미술관으로 문을 엽니다.

화가와 조각가들은 카탈루냐 건축가인 호세프 루이스 세르트(Josep Lluís Sert)와 협력해 예술, 자연, 건축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장소를 만들었습니다. 건축가 호세프는 1950년대 팔마 데 마요르카에서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초현실주의 예술가 호안 미로를 위해 인상적인 스튜디오도 설계했습니다.

반세기에 걸쳐 부부가 가꾸어 나간 이 미술관에는 곳곳에서 그 섬세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3만5000권 이상의 책을 소장한 도서관에도 희귀한 예술 서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최고 수준의 상설 컬렉션 외에도 남프랑스를 대표할만한 특별 전시도 꾸준히 열고 있더군요. 제가 찾은 시기는 바바라 헵워스의 개인전 개막을 단 며칠 앞둔 분주한 시기여서, 개인전을 보진 못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입구 카페에서 만난 천하태평한 고양이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 하지 않는 천하태평 치즈냥이. ©김슬기
생 베르나르 예배당과 자코메티의 뜰
조르주 브라크의 스테인드글라스 [흰 새]가 보인다. ©김슬기
탐험은 이제부터입니다. 미술관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조각 정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방문객들은 페르낭 레제의 도자기, 폴 베리의 유쾌한 분수, 기념비적인 알렉산더 칼더의 조각과 타키스의 악기 조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스 아르프, 에두아르 칠리다, 에릭 디트먼, 바바라 헵워스, 호안 미로의 계절마다 순환되며 선보여지는 곳이기도 하죠.

건물 곳곳에도 거장들의 흔적이 숨어 있습니다. 피에르 탈 코트(Pierre Tal-Coat)가 만든 외벽의 기념비적인 모자이크, 서점 벽에 설치된 마르크 샤갈의 모자이크 <연인>,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수영장 <물고기> 등도 건물에 새겨져 있죠.

자코메티 조각이 있는 안뜰. ©김슬기
Georges Braque [물고기(Les Poissons)], 1963 ©Marguerite and Aimé Maeght
자코메티와 조르주 브라크는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두 예술가입니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작은 예배당을 놓치면 안됩니다. 가슴에 묻은 막내 아들에게 헌정된 생 베르나르 예배당(1964)에는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obal Balenciaga)의 12세기의 스페인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라울 우박(Raoul Ubac)의 부조 <십자가>와 조르주 브라크의 웅장한 스테인드글라스 <흰 새(Oiseau Blanc)>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실에는 브라크의 걸작들이 잔뜩 걸려 있지만 이 작은 예배당만큼 감동적인 곳은 없을 겁니다.

자코메티를 위한 안뜰(The Giacometti Courtyard)도 보입니다. 이곳에는 1959년에서 1960년 사이에 제작된 석고 조각 <걷는 남자 I과 II>, <서 있는 여자 I 과 II> 및 <큰 얼굴>이 서 있습니다. 이 작품은 뉴욕의 체이스 맨해튼 은행 광장을 위해 의뢰되었지만 해당 프로젝트가 좌초하면서 이 곳에 영구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자코메티는 꼼꼼하게 이 공간에 각 조각들의 위치를 직접 정했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읽으면 더 재미있는 이름인 <미로 미로(The Miró Labyrinth)>도 숨어 있습니다. 호안 미로가 도예가 친구 부자인 조셉 로렌스 아르티가스와 조안 가르디 아르티가스의 도움으로 완성한 곳이죠. 세라믹, 카라라 대리석, 철, 청동 및 콘크리트를 이용해 완성한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조각, 건축 및 자연을 하나로 결합해 말그대로 미궁을 만들어냈습니다. 벽에 그려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재현한 듯한 흰색 선을 따라 탐험하다 보면 관람객들은 그리스 신화 속 동물과 대면하게 됩니다.

보나르의 여름과 샤갈의 인생
통창으로 정원의 나무들이 보이는 지하1층 상설 전시실. ©김슬기
Alberto Giacometti <고양이(Le Chat)> 1951 ©김슬기
매그 재단은 피에르 보나르, 조르주 브라크, 알렉산더 칼더, 마크 샤갈, 자코메티, 바실리 칸딘스키, 바바라 헵워스, 페르낭 레제, 호안 미로, 피에르 탈 코트, 제르메인 리치에, 라울 우박 등 20세기 대표 작가들의 회화, 조각, 드로잉을 소장하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큰 사립 미술 컬렉션 중 하나입니다. 이 컬렉션에는 크리스토, 엘스워스 켈리, 윌프레도 람, 조안 미첼, 타키스와 같은 전후 및 현대 예술가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시실 내부로 들어가봅니다. 통창으로 푸릇푸릇한 녹음이 보이는 지하 1층 상설 전시실에는 이 대표작가의 걸작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자코메티의 깡마른 꼬챙이 같은 조각 <고양이>와 <개>는 에매 매그가 특별히 좋아한 조각이라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습니다. 보기 드문 도상이라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Pierre Bonnard [여름(L‘été)], 1917 ©Marguerite and Aimé Maeght
Marc Chagall [인생(La Vie)], 1964 ©Marguerite and Aimé Maeght
메인 전시실에는 죄다 벽화를 방불케 하는 대작들로 가득했습니다. 피에르 보나르의 <여름(L‘été)>(1917)은 이 지중해 도시에 잘 어울리는 밝고 생동감 넘치는 작품이었습니다. 대표작인 ‘테라스’ 연작 중 하나로 그림을 그리던 시기 보나르는 아내 마르트와 함께 프랑스 남부 빌라에서 머무르며 남프랑스의 찬란한 빛과 색채, 평온한 일상을 화폭에 담아냈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르크 샤갈의 <인생>(1964)일겁니다. 프랑스 국보로도 지정된 이 작품은 대구 미술관 전시에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고 바다를 건너오기도 했었죠.

샤갈은 매그 부부의 예술에 대한 헌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폭만 4m가 넘는 대작을 그렸습니다. 에펠탑이 보이는 푸른 도시 파리에서는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가 보이고, 샤갈이 평생 그려온 대표적인 도상이 이 그림에 모두 모여있습니다. 사랑과 기쁨, 고통과 환희 등 인생의 희로애락을 가감없이 표현된 대서사시 속에 상징들이 숨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 모세의 십계라는 성경 모티브와 청어 장수였던 아버지를 상징하는 청어와 유대교를 상징하는 랍비도 등장해 샤갈의 뿌리와 정체성을 드러내죠.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고난, 사랑, 연대, 꿈의 세계를 촘촘히 그려 넣은 이 그림에는 정말로 인생이 녹아 있었습니다. 무중력의 세계를 비행하는 듯한 군상으로 가득한 그림은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도상으로 더할나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희로애락을 모두 이 미술관에 묻고 세상을 떠난 매그 부부의 삶과도 닮아 보여서였습니다.

저는 체력적으로 꽤나 힘들었던 생폴드방스 여행을 마치고 니스로 돌아와 남유럽 여행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니스에서 찾아갔던 마티스 미술관과 샤갈 미술관은 기대했던 것만큼 볼만한 미술관은 아니라 안타깝게도 실망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런던에서 1년간 만나고 온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서울에서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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