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감독 김연경》은 한국 여자배구를 변화시킬까

정덕현 문화 평론가 2025. 11. 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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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리그 없는 프로배구에 던진 레전드 선수의 예능 출사표
스포츠 예능, 이제 예능의 차원을 넘어 스포츠 자체를 바꾸는 데 기여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과거 스포츠 예능은 '예능'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최근 스포츠 예능은 단순한 예능의 차원을 훌쩍 넘어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포츠의 저변을 넓히고 문화의 변화를 이끄는 스포츠 예능 세계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MBC 예능 《신인감독 김연경》 포스터 ⓒMBC

"조금 의미 있는 걸 항상 하고 싶었어요. 이걸로 진짜 배구 발전을 많이 시키고 싶어요." 은퇴 후 첫 행보로 MBC 예능 《신인감독 김연경》을 선택한 김연경은 이렇게 말했다. 예능에서 '배구 발전'을 말하는 것이 다소 과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1승11패, 국제대회 30연패 등 한국 여자배구가 겪는 수모와 위기를 떠올리면 이 출사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여자배구는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4강 신화를 일궈낸 팀이 아니었던가.

김연경 선수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은 한국 여자배구는 올해 18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하며 국제배구연맹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 탈락이 확정됐다. 김연경이 떠난 뒤 국내 리그의 활기도 눈에 띄게 꺾였다. 리그 흥행마저 흔들리는 지금, 김연경과 제작진이 하필 배구 예능을 시작한다는 것은 '진심' 없이는 불가능한 시도로 보인다.

김연경은 위기의 원인으로 '시스템 부재'를 짚었다. 특히 2부 리그가 없어 방출된 선수들이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되는 현실에 주목했다. 《신인감독 김연경》은 바로 이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김연경은 과거 1부 리그에서 활약했지만 각자 다른 이유로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들을 모아 '원더독스'라는 팀을 만들고, 프로리그 제8 구단 입성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JTBC 예능 《최강야구》 포스터 ⓒJTBC

스포츠 예능이어서 가능한 것들

은퇴 선수들이 재도전하는 형식은 《최강야구》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진짜 여기서 뛴 선수들이 다시 프로리그에 입성하려 한다는 점에서 색깔이 완전히 다르다. 실제로 이 팀에서 남다른 기량을 보인 이나연 세터는 최근 흥국생명에 입단해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여자배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스포츠였던가. 방송을 접한 시청자들은 모두 이런 반응을 보인다. 프로그램이 스토리로 삼은 언더독 은퇴 선수들의 성장기가 시선을 잡아끌지만, 중계를 통해서는 포착하기 어려운 '실전 디테일'이 더해졌다. 감독이 상대에 맞게 어떤 전술을 짜고, 선수들이 여기에 맞춰 경기를 어떻게 치르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는 득점과 실수들이 예능 프로그램 특유의 스토리텔링으로 다이내믹하게 그려졌다. 마치 《슬램덩크》나 《하이큐》 같은 애니메이션의 실제 버전을 보는 듯이 극적인 편집과 구성이 스포츠 중계보다 더 많은 재미 요소를 끌어냈다.

《신인감독 김연경》이 스포츠 중계보다 풍성한 디테일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실제 경기에서 허용되지 않는 촬영과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선수 유니폼마다 소형 마이크가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선수들을 포착하는 카메라도 여러 대다. 예능의 리얼리티화가 스포츠 예능에도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더 많은 마이크와 카메라는 그만큼 많은 데이터를 만들어낸다.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멈추고, 되돌리고, 이전 영상을 끼워넣어 이야기의 결을 세밀하게 만든다. 스포츠 중계도 편파 중계처럼 예능적인 재미를 더할 수 있다. 그래서 똑같은 배구 경기라도 《신인감독 김연경》이 훨씬 더 재밌게 느껴진다.

JTBC 예능 《뭉쳐야 찬다》 포스터 ⓒJTBC

'경험'과 '과정' 공유하며 스포츠를 새롭게 즐기다

예능적인 촬영 기법과 편집 구성의 힘은 쿠팡플레이 예능 《슈팅스타》 같은 축구 예능에서도 잘 드러난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 장면을 위해 경기복에 카메라를 부착하고, 레이싱 드론까지 경기 촬영에 투입했다. 실제 경기에서는 경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허용되지 않는 일들이지만, 예능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다. 그 결과 '축알못(축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방송을 통해 K리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최강야구》는 스포츠 예능의 전성기를 이끈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은퇴한 레전드 선수들이 한 팀을 이뤄 고교, 대학 등 아마추어팀들과 맞붙는 이 프로그램은 김성근 감독을 사령탑으로 세워 드라마틱한 승부를 만들어 강력한 팬덤을 구축했다. 실제 직관 경기에 관중이 몰리는 진풍경까지 낳았고, 현재 프로야구가 황금기를 맞이한 데 이 프로그램 역시 일조한 면이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이 프로그램 역시 중계만으로는 보여주기 어려운 경기의 디테일한 내용을 예능 형식으로 채워 팬덤까지 만들어내는 힘을 발휘했다.

과거 스포츠 예능은 '예능'에 더 가까웠다. KBS 《천하무적 야구단》 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동호인 야구를 소재로 내세웠지만, 야구만큼 중요했던 건 캐릭터들의 예능적인 웃음이었다. KBS 《우리동네 예체능》도 마찬가지다. 생활체육의 저변을 넓힌다는 기치로 배드민턴부터 탁구 같은 동네 체육의 현장에 뛰어들어 대결을 벌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역시 강호동이 전면에서 이끄는 예능적 재미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스포츠 예능은 코로나19 전후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JTBC 《뭉쳐야 찬다》가 '스포츠 전설들의 조기축구'라는 콘셉트로 사실상 전 경기를 중계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농구 버전인 《뭉쳐야 쏜다》로 그 바통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스포츠 종목 자체에도 지각변동을 만든 사례가 등장했는데, 바로 KBS 《씨름의 희열》이다. 한때 시청률 50%를 넘나들던 씨름이 비인기 종목으로 추락했을 때, 이 프로그램은 오디션 서바이벌 형식을 도입해 시청자들을 다시 씨름판으로 끌어당겼다.

예능 형식이 더해지자 선수 개개인이 서사와 매력을 가진 캐릭터로 떠올랐고, 찰나의 승부는 슬로 모션으로 그 놀라운 기술들을 세세하게 포착해 냈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태백, 금강급 씨름 선수들의 팬층이 급증했고, 이는 씨름이라는 스포츠의 저변을 넓혔다. 스포츠 예능은 스포츠 중계가 미처 전하지 못하는 희열을 보여줌으로써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선제적으로 보여줬다.

현 세대에게 콘텐츠 소비의 중요한 하나의 코드는 '경험'과 '과정'이다. 지금의 팬들은 일회성 소비보다,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 과정을 함께 나누는 것을 중시한다. 스포츠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 국가 스포츠 이벤트가 중심이 돼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겼던 시대는 지났다. 이른바 팬덤 소비가 스포츠에도 들어오고 있다. 이 변화를 보면 스포츠 예능이 실제 스포츠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유가 설명된다.

팬들은 똑같은 경기라도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 더욱 열광한다. 설사 지더라도 그 과정이 어땠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스포츠 중계도 관객의 이런 요구를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스포츠 예능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스포츠를 진작시킬 수 있는지 그 해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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