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쌓아 올리는 위스키의 맛과 가격
[명욱의 酒키피디아] (3)
위스키 숙성
지난 추석 편의점 업계에 ‘사건’이 터졌다. CU가 추석 선물로 출시한 7500만원짜리 최고급 위스키 ‘글렌그란트 65년’<사진>이 팔렸다. 백화점에서도 팔리기 어려운 최고가 상품이 편의점에서 팔린 것이다. 하지만 위스키 업계에서 7500만원짜리는 최고가가 아니다. 싱글 몰트 위스키로 유명한 ‘발베니 60년’은 2024년 3억3000만원에 팔렸고, ‘맥캘란 아다미 1926 60년’은 2023년에 무려 35억원에 낙찰됐다.

이 술들이 어마어마한 가격에 판매될 수 있는 건 ‘숙성 기간’ 때문이다. 스카치위스키의 법정 최소 숙성 기간은 3년 이상이다. 일반적으로 프리미엄급 제품은 12·15·17년, 최고급 제품은 30년 정도인데, 이 위스키들은 그 두 배가 넘는 60년 이상의 숙성 기간을 자랑한다.
스카치위스키의 숙성은 기본적으로 오크통에서 진행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법적으로 오크통 숙성이 아니면 위스키로 인정하지 않는다. 위스키는 기본적으로 맥주와 유사한 곡물 발효주를 증류한 술이다. 증류 직후에는 소주처럼 투명하지만, 오크통에 들어가면서 리그닌·헤미셀룰로스·탄닌·바닐린 등 다양한 성분이 추출돼 맛이 달라진다. 리그닌은 스모키·우디한 향을, 헤미셀룰로오스는 캐러멜과 토스트 향을, 탄닌은 떫은감과 구조감을, 바닐린은 바닐라·크림 브륄레·카스타드 향을 만들어낸다.
숙성의 또 다른 장점은 위스키 맛이 부드러워진다는 점이다. 증류 초기에는 알코올과 물이 따로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 분자와 알코올 분자가 결합한다. 이러한 결합 덕분에 오래 숙성한 위스키일수록 알코올 자극이 줄고 맛이 부드러워진다.
숙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증발’이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온도 변화에 따라 오크통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매년 2% 정도의 위스키 원액이 증발한다. 이로 인해 향이 응축되고, 알코올 자극이 부드러워지며, 질감이 점점 유려해진다. 하지만 위스키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숙성을 오래할수록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증류업자들은 이를 천사에게 나눠주는 몫이라 하여 ‘에인절스 셰어(Angel’s Share)’라고 불렀다.
이러한 오크 숙성을 단기간에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사실 유사한 맛을 내는 방법은 존재한다. 첫째,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는 것이다. 오크통은 일반적으로 크기가 200L 정도인데, 이보다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면 위스키 원액이 나무와 맞닿는 표면적이 많아진다. 오크의 맛과 향이 빠르게 우러나오지만, 증발량이 많아져 위스키가 빨리 사라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오크칩을 더해 추가적인 향과 맛을 침출시키거나, 오크통 내부에 홈을 파서 원액이 닿는 면적을 넓히는 ‘웨이브 스테이브’라는 방법도 있다. 오크칩은 인위적이고, 웨이브 스테이브는 가공이 까다롭고 수작업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숙성 창고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숙성 속도를 높이거나, 위스키 원액에 고주파 진동을 가해 숙성을 가속하는 기술도 있다. 이 외에도 펄스 전기장(pulsed electric field), 고압 처리, 인공지능(AI) 시뮬레이션, 마이크로파(microwave)나 방사선 조사 등의 기술이 연구되고 있으나, 아직은 실험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기술이 더 발전하면 언젠가는 30년 숙성을 하루 만에 끝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유사한 맛을 낸다 해도 가격은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술은 단 하루의 스토리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십 년 숙성된 위스키가 수천·수억 원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그 안에 사람·공간·지역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켜켜이 쌓인 층을 하나씩 펼칠 때마다 각각의 감상 포인트가 생긴다.
결국 언젠가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 감성만큼은 따라올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 AI 시대에 인간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거구 쩍벌남과 13시간 초밀착 비행… “알아서 비즈니스가” 기내 민폐 논쟁
- 삼성바이오, 美 생산거점 첫 확보…6만L 규모
- 美서 위장결혼, 프랑서에서 도청...中의 기상천외한 스파이 수법
- “아내·자녀에 입에 담기 힘든 욕설” 법적 대응 나선 추신수
- “하루 7~8시간 자고 의대 6곳 합격”...서울대 의대생의 공부법은
- 감사원장 “경제 전시 상황… 위기 극복 업무 공직자 개인 책임 묻지 않겠다”
- 中, 세계 최대 화물용 무인기 ‘창잉8’ 첫 비행 성공
- 정동영, 北 장웅 IOC 위원 사망 소식에 애도 표명
- 학교 돈으로 수억대 ‘상품권깡’… 카이스트 직원, 구속 송치
- 김재섭 “정원오, 여직원과 단둘이 출장 표현 안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