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투자할까 말까… ‘행복한 고민’이 반도체 미래 결정한다
경제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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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예상했던 반도체의 겨울은 오지 않았다. 겨울은커녕 오히려 한여름처럼 뜨겁다. ‘반도체 겨울론’으로 한국 증시를 들었다 놨다 하던 모건스탠리는 슬그머니 의견을 바꿨다.
모건스탠리는 1년 전 ‘메모리-겨울은 항상 마지막에 웃는다’ ‘겨울이 곧 닥친다’라는 보고서를 내며 ‘반도체 겨울론’을 설파했다. 그런데 최근 ‘메모리 슈퍼사이클-상승하는 AI 물결이 모든 배를 띄우다’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2025년 말까지 디램(DRAM) 가격이 조정받을 수 있다는 전망을 철회하고, 2027년까지 가격이 상승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성문치고는 너무 늦었다. 디램(DDR4 8Gb)의 평균 고정가격은 이미 2025년 4월부터 반등을 시작했다. 매달 가격이 올라 2025년 3월 1.35달러에서 10월 초 현재 6.3달러로 이미 네 배 넘게 올랐다.
반도체 가격을 예상하기 힘든 이유는 인공지능(AI) 때문이다. 반도체는 모든 전자제품에 들어가기 때문에 경기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가격을 전망하기 위해 미국 공급관리협회(ISM)의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 등을 주로 활용했다. 경기가 좋으면 반도체 가격도 올라가고, 경기가 좋지 않으면 반도체 가격도 내려가기 때문이다.
경기 안 좋은데도 공급 부족
지난 3년간 구매관리자지수가 50을 넘었던 달은 세 번밖에 없다. 과거의 시선으로 보면 반도체 가격은 내려가는 게 맞다. 하지만 글로벌 빅테크 업체들이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현재 경기와 무관하게 막대한 돈을 AI에 쏟아붓고 있다. 이 중 상당 비중이 반도체로 흘러 들어간다. 평범한 디램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 서버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구닥다리 하드디스크(HDD)까지 공급이 부족하다.
공급 부족은 생산 부족에서 나오고, 생산 부족은 예측 실패에서 나온다. 팔릴 줄 알았다면 만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생산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렵다. 사석에서 만난 에스케이(SK)하이닉스 고위 관계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모바일 시대가 찾아왔을 때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하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공급 부족은 2~3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런데 AI 시대는 어디까지 파급될지 예상하기가 힘들다. 사는 사람이든 파는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SK하이닉스는 AI 생태계에서 독주하는 엔비디아에 사실상 독점적으로 HBM을 납품하고 있다.
AI 산업은 범위를 획정하기 어렵다. 챗지피티(ChatGPT), 제미나이(Gemini) 등 빅테크 기업에서 제공하는 챗봇은 AI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해 통번역, 문서 정리, 질의응답 등을 한다.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최근에 나온 추론(Reasoning) 모델은 더 많은 연산 능력이 필요하다. 바로 답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답을 다시 입력해 맞는지 틀린지 재검증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발표 자료를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영상을 만들고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모든 작업이 AI 영역에 들어간다. AI는 모든 곳에 침투할 수 있고, 창의성 부족만이 한계일 뿐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AI가 인지→추론→에이전틱AI(Agentic AI)→피지컬AI(Physical AI)로 발전하고, 단계를 넘어설 때마다 연산 능력이 기하급수로 늘어난다고 설명한다. AI가 직접 호텔·항공·식당을 예약하고 물건을 구매하는데, 주문을 하는 AI와 주문을 받는 AI가 소통(A2A)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누비고 로봇이 사람 대신 일한다. AI로봇이 사람 대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할 필요조차 없다. 일상적인 가사 업무부터 공장 제조업까지, 사람이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도 해낸다.
이 모든 프로젝트에 메모리 반도체가 필요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먼 미래의 공상과학적 상황까지 가정하며 공장을 미리 지어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겠다는 사람이 주문을 넣는데 무시할 수도 없다. 주문을 넣겠다는 수량만 해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얼마 전 오픈에이아이(OpenAI)의 샘 올트먼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방문했다. 오픈AI는 삼성전자와 포항에, SK하이닉스와 전남에 AI 데이터센터를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나 2029년까지 웨이퍼 기준 월 90만 장에 이르는 D램을 주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인 삼성전자의 전체 D램 생산 능력은 월 60만~65만 장이다. SK하이닉스는 그보다 적은 월 50만 장 내외다.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 70%를 차지하는 두 회사의 모든 생산 능력을 더한 것만큼을 오픈AI가 사겠다는 것이다. 말이 그렇지, 설마 그렇게 많이 사겠나 싶다.
밀려드는 주문
월 90만 장 메모리 반도체 구매 보도가 나오고 며칠 뒤, 에이엠디(AMD)는 2026년 하반기부터 오픈AI에 6기가와트(GW) 규모의 AI 반도체를 공급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오픈AI는 AMD가 2026년 출시할 MI450 반도체를 기반으로 1GW급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예정이다. 이번 계약을 통해 AMD는 연간 수백억달러의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한다. 굳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AMD의 AI 반도체에도 메모리 반도체는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이에 앞서 2025년 9월 엔비디아는 오픈AI에 1천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엔비디아는 “오픈AI의 차세대 AI 인프라를 위해 데이터센터에 엔비디아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에 대한 의향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우선 100억달러를 투자해 2026년 하반기부터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반도체 ‘베라 루빈’을 활용한 AI 인프라가 가동될 예정이다. 젠슨 황은 “10GW는 400만~500만 개의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해당하며, 이는 엔비디아가 2025년 출하할 총량과 같고 전년 대비 두 배에 달한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AI 반도체 회사의 전체 출하량에 해당하는 물량만큼 추가 수요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엔비디아는 일론 머스크의 엑스에이아이(xAI)에 20억달러(약 2조8천억원)를 투자한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보도했다. xAI는 총 200억달러 규모의 자금조달을 추진하는데, 이 중 20억달러를 엔비디아가 투자하는 것이다. xAI는 미국 테네시주에 세계 최대 데이터센터 ‘콜로서스’를 구축하고 있다. 여기에는 10만 장의 GPU가 탑재될 예정이었는데, 투자금이 늘어나면서 20만 장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이처럼 최근 발표된 AI 인프라 투자 계획만 해도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AI 인프라와 맞먹는다. 오픈AI는 돈이 없다. 엔비디아로부터 투자받고, AMD로부터 지원받아 투자를 이어가겠다는 계획이다.
‘AI 버블론’ ‘자전거래’ 의혹도 제기된다. 엔비디아 돈으로 엔비디아의 AI 반도체를 사고, AMD 돈으로 AMD 반도체를 사는 방식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젠슨 황은 이에 대해 “그들은 아직 돈이 없기 때문에 주식 발행과 부채를 통해 조달해야 한다. 과거 오픈AI에 투자했을 때 후회하는 점은 더 많이 투자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능성은 있는데 돈이 없으니 투자를 해준 것뿐이라는 의미다.
소란스럽게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오픈AI와 달리, 돈이 있는 업체들은 굳이 그렇게 떠들지 않아도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구글은 2025년 AI에 850억달러(약 116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애초 계획보다 100억달러 늘렸다. 마이크로소프트는 800억달러, 메타는 7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젠슨 황은 “2000년 닷컴버블 당시엔 인터넷기업 전체 가치를 합쳐도 400억달러 수준에 불과했지만, 지금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은 이미 2조5천억달러가 넘는 실제 사업을 운영 중이다. 수조달러 규모의 거대한 전환기에 이제 막 수천억달러를 투입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기술 패러다임 전환 게임
생각보다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도 급등했다. 생산을 늘려야 한다. 그렇다고 발표된 수치만 믿고 현재의 생산 능력을 두 배, 세 배로 늘릴 수는 없다. 과잉투자를 했다가 그만큼의 수요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 또한 낭패다. 몰려드는 수요를 보며 한국 반도체 산업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행복한 고민의 결과가 언제나 좋은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과소투자를 하다가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들에 추격당하거나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과잉투자를 했다가 AI 거품이 꺼질 때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 AI 시대의 반도체 산업은 더는 경기순환이 아니라 기술 패러다임 전환의 게임이다. 행복한 고민이 한국 반도체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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