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학살 가져온 참 나뿐 사람…노주마리 향기로 다 덮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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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나는 풀의 강인함을 주입식 학습 받아온 세대다.
이번에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우리는 풀을 심고 나무를 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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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땡큐!]

풀이 눕는다. 나는 풀의 강인함을 주입식 학습 받아온 세대다. ‘풀’에 동그라미 치고, ‘연약해 보이지만 강한 생명력을 지닌 민중을 상징’이라고 적어둔다.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울었다’에 밑줄 치고, 의인법이라 적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풀’, 김수영)
노주마리 향기 기분이 시원하다
수능 언어영역 점수가 나쁘지 않던 나는 자라고 자라,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사람이 된다. “이거 뭐예요?” “풀이지.” 할머니가 그린 그림을 가득 메운 건 풀색이다. 풀색이니, 풀이지. “무슨 풀이에요?” “노주마리.”
나는 로즈마리라 부르고, 아흔의 노인은 노주마리라 부르는 풀, 로즈메리. 제주에는 로즈메리가 지천이다. 싱그러운 향이 어디선가 불어와 돌아보면 담장 너머 어김없이 로즈메리가 있다. 로즈메리가 푸릇한 그림 옆에는 소도 있고, 집도 있고, 군인도 있다. 총을 들고 와서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운 군인들. 군인 옷도 풀색이라, 선명한 색은 불타는 집뿐이다. ‘막 나뿐 놈들’ 그림 아래 크게 적힌 글씨. 제주에선 길 가다가도 마주치는 4·3 이야기다. 그 아래 작은 글씨로 쓰인 말.
‘나뿐 사람들이 있으민 마음이 불편하다 노주마리 향기 기분이 시원하다’
그 시절 기억에 마음 힘들 때면 로즈메리 향을 맡으며 견뎠다고 했다. 마음이 힘들다고 밭에 가는 일을 멈출 수 있나. 끼니 챙겨 먹이는 일을 안 할 수 있나. 로즈메리 향에 의지해 살았다. 로즈메리를 잔뜩 지고 걸음을 옮기는 소 그림도 있다. ‘노주마리 배달부’
‘4·3에 소도 새끼를 이저버려. 토끼도 엄마를 이저버려. 울다가 울다가 친구가 되언.’
사람만 자식을 잃은 게 아니다. 그날 소막(외양간)이 불탔던 게 기억났다고 했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 그의 나이 89살에. ‘소도 얼마나 무서웠을꼬’ 뒤늦게 깨달아 소에게 로즈메리 향을 건네지 못했다. 그게 후회가 된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그림작업장에서 만난 홍태옥 어르신 이야기다.

4·3 학살자 추도비 사라지길
이번에는 나무를 심는 사람이다. 그는 흙을 파고 뿌리를 심고 물을 준다. 나무가 자라기를 기다린다. 그 모습을 커다란 추도비가 지켜보고 있다. 추도비의 주인공은 ‘막 나뿐 놈들’의 대장, 박진경 대령. 제주4·3 당시 조선경비대 제9연대장으로 부임해 초토화 작전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가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제주도민 6천여 명이 ‘폭도’라는 명목으로 체포됐다. 그중 살아나온 자가 몇이나 될까. 로즈메리가 필요한 기억이다.
추도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적어도 추도비 옆에 4·3 안내판이라도 설치하라는 요구가 있다. 무엇도 이뤄지지 않았다. 몇 년 전 시민단체에서 추도비에 철창을 씌워 가두었다. 철창은 강제 철거됐다. 종종 누군가에 의해 추도비가 훼손되고, 세금으로 다시금 복구된다. 그래서 나무를 심는다. ‘사월엔 나무를 심자’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정유진 작가. 그의 전시(산지천갤러리)에서 탱자낭과 찔레낭을 만났다.
‘탱자낭, 찔레낭 하얗게 넋을 부르는 향그러운 꽃낭들 심어 아름드리 더러운 것들을 덮어버리자’
우리는 풀을 심고 나무를 기른다. 그것들이 우리 삶을 지탱해주기를 바라며. 금세 날아갈 풀향에 의지해서 하루를 살고 다시 하루를 산다. 언제 파헤쳐질지 모르는 나무가 자라길 기다리며 옳지 않은 일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풀은 풀대로 강하다. 우리는 우리대로 꾸준하다. 4·3 학살자 박진경의 추도비가 사라지길, 다시금 철창에 갇히길, 역사 앞에서 제대로 평가받길 바란다.
희정 기록노동자·‘죽은 다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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