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초고에 ‘빨간펜 깨알 피드백’…저희를 빚어내신 교수님[자랑합니다]

25년 전이다. 석사 논문 중간발표를 마치고 간 찻집에서 선배인 엄경희 교수님을 처음 만났다. 약간 차가운 듯 보였던 첫인상과 달리, 교수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았다. 그날 이후로 교수님은 강의하러 학교에 올 때마다 석사 논문을 도와주셨다. 타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온 터라 자주 이방인 같았던 나는 교수님 덕분에 대학의 울타리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박사과정 중에 지도 교수님이 정년 퇴임을 하시고 전공 교수가 부재한 동안에도 교수님께서 박사 논문을 지도해 주셨다. 그리고 첫 학술논문을 발표할 때는 초고에 빨간 펜으로 깨알같이 피드백해 주셨다. 논문 수정을 거듭하는 동안, 그 붉은 글자들 속에서 나는 논리적인 글의 호흡을 배우게 되었고, 논문의 맥락을 풀어가는 논리적인 힘도 갖게 되었다. 그 힘은 연구자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이후로 나는 교수님의 손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빚어지는지를 오래 보아왔다. 교수님에게 학생들은 제자가 아니라 자식에 가까웠다. 자식처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온 마음과 힘을 쏟았다. 강사 시절에도,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교수님은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교수님의 세심한 지도가 제자들의 학문적 성과로 드러날 때마다 감동이 일었다. 나는 교수님처럼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이끌어 주는 교수를 본 적이 없다. 얼마 전에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 교수를 만나서 엄경희 교수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 대학에서 그분처럼 지극한 마음으로 제자를 키운 교수는 없을 거라고.
교수님은 올해 2월에 조기 퇴직을 하면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셨다. 정년 퇴임을 4년 앞서 한 것은 내면 성찰과 실존적 문제에 집중하기 위한 교수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고 가다듬기 위해 용기를 낸 것이었다. 이제 교수님은 수년간 축적된 시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실험하고 있다. 이는 언어의 세계를 넘어 회화의 세계로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예술적 항해이다.
지난 5월 코엑스에서 개최된 ‘아트 페어’에 교수님의 그림이 전시되었다. 또 다른 삶의 출발점에 선 교수님의 모습을 기대하며 전시장으로 향했다. 교수님의 작품들은 정교하게 빚어진 시 같았다. 벽 중앙에 걸린 유화 ‘파란 대문’에는 교수님의 새로운 정체성이 담겨 있었다. 평론가와 교수의 삶을 넘어 화가의 삶으로 가는 길목이 보였고, ‘파란 대문’이 함의하는 경계 너머의 자유로운 유영이 보였다.
무더운 여름날, 교수님의 안성 작업실을 방문했다. 고요한 작업실에는 1년 6개월 동안 붓을 든 교수님의 고독한 시간이 백여 개의 작품으로 있었다. 작업실은 무한한 상징의 바다 같았다. 교수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스스로 던지면서 시적 상상력을 화폭에 옮겨놓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림 속에는 35년 가까이 대학에서 현대시를 가르치며 글을 써온 교수님의 치열한 삶의 여정과 시적 언어에 기초한 문학적 정체성이 깃들어 있었다.
이러한 도전은 결실로 이어졌다. 2024년 청송야송미술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였으며, 2025년에는 중앙회화대전에서 입선하여 국내에 전시되었다. 중앙회화대전 입선작 ‘다정(多情)’은 프랑스에서도 심사를 통과하여 올해 12월 프랑스 파리 소재 갤러리 89에서 전시하게 된다. 이에 앞서 11월 19∼23일에는 삼청동 소재 갤러리 마롱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그간 작업실에서 실험한 상상력의 산실을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다. 전시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회화 속에 담긴 진지한 실존적 물음 속에서, 우리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회귀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박선영(서울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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