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팔란티어의 고졸 채용

어수웅 논설위원 2025. 11. 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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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을 만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미 명문 리드 칼리지에 입학하고도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졸업생의 박사 취득 비율이 미국 톱3 수준으로 ‘교수들의 예비 학교’라 불리는 일류 대학이었지만, 교양 필수 몇 과목을 들은 뒤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이 힘들게 마련해 준 등록금을 이런 도움 안 되는 공부에 ‘낭비’해야 한다니… 죄책감이 든다.” 자서전에서 그는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라고까지 했다.

▶페이팔·테슬라·스페이스X 등을 창업하거나 투자한 실리콘밸리의 대부 피터 틸은 한발 더 나간다. 그는 ‘고장 난 대학교육’이라고 표현하며 “대학이 쓸데없는 빚(등록금 대출)을 지게 만들고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졸업장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틸은 미국 테크 업계에서는 드물게 트럼프를 공개 지지해 온 보수주의자다. 미국 대학들이 학생 선발과 학교 행정 등에서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인식이 그 이면에 있을 수도 있다.

▶역시 피터 틸이 창업하고 현 이사회 의장인 팔란티어의 ‘고졸 채용 파격 실험’이 곧 선발 인원을 확정한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인공지능(AI) 데이터 분석 기업인 팔란티어는 거품 논란도 있지만 올 한 해 주가가 최고 300% 오르며 급성장한 AI 시대 핵심 기업이다. ‘능력주의 펠로십’이란 제목으로 고교 졸업생만 뽑아 지난 4개월간 교육했다. 500명 넘는 지원자 중 22명을 선발했는데, 그중엔 명문 브라운대에 합격하고도 포기하고 온 청년도 있었다. 채용 공고에서 팔란티어는 “미국 대학은 입학 기준이 불투명하며 극단주의와 혼란의 온상이 됐다”면서 “오직 실력만 보겠다”고 선언했다.

▶반론도 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대학 졸업장은 여전히 안정적인 사회 진출과 소득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벨트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고졸이 마주하는 사회적 장벽이 없어지겠느냐는 현실론과, 대학은 단순히 지식 습득을 넘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규율과 소양을 배우는 사회화 공간이라는 반박도 있다.

▶하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기존 대학이 낡은 유물이 돼가고 있다는 인식은 광범위한 공감을 얻고 있는 듯하다. AI 등 핵심 기술은 대학 커리큘럼 업데이트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진화하고 있고, 명문대 졸업장의 가치는 점점 떨어져가고 있다. 지금의 비싸고 느리고 치열하지 않은 대학 모델을 시급히 재정립하지 않는다면, 대학은 위기를 넘어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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