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백 작가의 클래식 프리뷰] 가을 끝자락, 겨울 길목에서… 손민수&슬로베니안 필하모닉

경인일보 2025. 11. 5. 18:3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절망감 이겨낸 명예회복 선율… 감동과 야성 담긴 낭만의 순간

교향곡 1번 실패 무력감 딛고 재기
피아노 협주곡 2번, 글린카상 수상
황홀한 오케스트레이션·서사 감명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삶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죠. 기쁜 날이 있으면 슬픈 날도 있고, 평온하게 살아가다 예기치 못한 슬픔을 겪기도 합니다. 결국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일은 늘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처럼 우리 삶에 종종 찾아오는 절망감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선 음악가,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음악을 소개합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태생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입니다. 지금은 작곡가로 더 유명하지만 생전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도 명성을 떨쳤는데요. 당대의 거장이자 사촌이었던 알렉산더 실로티 덕에 재능을 일찍 발견한 그는 실력이 워낙 뛰어난 데다 낭만적이고 다이내믹한 연주 스타일로 인기를 끌면서 이른 나이에 스타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24세 때 야심 차게 발표한 교향곡 1번이 비평가들로부터 “모세가 이집트에 내린 10가지 재앙”, “지옥에서나 환영받을 작품”이라고 맹비난받은 일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라흐마니노프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고 맙니다. 이후 그는 3~4년간 곡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사촌들의 권유로 신경의학 박사 니콜라이 달을 만나게 되는데요. 달 박사는 약 4개월간 라흐마니노프에게 여러 심리치료를 시행합니다. 특히 그에게 매일 최면요법을 하면서 이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죠.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씁니다. 그 작품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꾸준한 치료와 사촌들의 보살핌 속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다시 작곡에 착수한 그는 이듬해 새 작품을 발표했는데요. 작품은 초연부터 말 그대로 대성공하고, 라흐마니노프는 그해 글린카 상까지 받으며 명예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달 박사에게 헌정했죠. 이 곡이 바로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대중에게 친숙한 이 곡의 가장 큰 매력은 감동적이고 황홀감을 주는 오케스트레이션입니다. 러시아적 애수 짙은 낭만성과 강렬한 야성성도 빠트릴 수 없죠. 여기에 더해 라흐마니노프가 경험한 좌절과 극복의 서사는 청자에게 깊은 감명을 줍니다. 그래서 이 곡을 잘 연주하기 위해서는 기술력뿐만 아니라 음악의 내러티브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표현력, 삶에 대한 통찰력 역시 중요하죠.

‘손민수 & 슬로베니안 필하모닉’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공연입니다. 협연자인 손민수 피아니스트가 탁월한 연주 실력은 물론,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 전곡 사이클을 통해 라흐마니노프의 생애를 폭넓게 탐구한 바 있는 명연주자이자 음악가로서 신념과 철학이 있는 교육자이기 때문인데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임윤찬 역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의 지도를 받고 있습니다. 임윤찬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손민수를 일컬어 “길잡이이자 구원자”라고 할 정도로 깊은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죠.

가을에서 겨울을 향해 가는 이런 시기에는 마음도 쉽게 약해지곤 합니다. 요즘 유난히 힘든 일이 있었다면 하루쯤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가만히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무력감을 딛고 재기에 성공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여러분의 지친 마음을 다잡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Copyright © 경인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