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려운 건 ‘인류 멸종’이 아니다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한겨레 2025. 11. 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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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인 빌 게이츠는 “기후 변화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분명하지만, 인류의 종말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최빈국 삶의 개선을 우선에 두는 관점으로 기후 대응이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빌 게이츠 누리집 갈무리

남종영 |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

한 중학교에서 기후변화 수업을 마친 직후였다. 한 여학생이 쪼르르 오더니 물었다.

“선생님, 인류는 몇년에 멸종하나요?”

“걱정 말렴. 적어도 네가 살 때는 멸종하지 않을 테니까.”

아이들이 느끼는 기후 우울이 이런 것이구나. ‘미래는 언제나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하며 살아왔던 1970년대생이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집에 돌아와 ‘인류 멸종’이라는 말을 곱씹어봤다. 혹시나 해서 학술 검색 엔진을 돌려봤는데,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른 인류 멸종을 연구한 과학 논문은 찾기 어려웠다.

이달 10일 브라질 벨렝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30)를 앞두고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인 빌 게이츠가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린 글이 논란을 부르고 있다. 그는 “기후 변화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은 분명하지만, 인류의 종말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종말론적 시각은 기후 커뮤니티의 상당수를 단기적 배출 목표에 과도하게 집중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최빈국 삶의 개선을 우선에 두는 관점으로 기후 대응이 바뀌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그가 정책결정자, 기업가, 과학자, 환경운동가로 구성된, 이른바 ‘기후 커뮤니티’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브레이크스루 에너지’라는 플랫폼을 통해 10년 이상 청정에너지 혁신에 거금을 투자해 왔다.

‘인류 멸종’이라는 단어가 미디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쓰인다. 이해한다. 의욕적으로 위기를 경고하려다 보면, 과감한 수사학에 빠지기도 하니까.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인류는 100년 이내 멸종한다”고 주장했다.(정확히는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했는데 와전됐다.) 기후환경단체 ‘멸종반란’의 공동 창립자인 로저 할람은 “이번 세기말 60억명이 죽는다”고 했다.(이 단체는 초창기에 인류 멸종 내러티브를 심심찮게 사용했다.)

그러나 과학에 기반하지 않은 수사학은 종종 제 발목을 잡는다. 이 약점을 파고든 게 기후회의론자다. 이들은 기후위기에 대한 경고를 싸잡아 종말론으로 치부하고, 가난한 나라의 개발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둘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기후변화 대응 노력과 외국 원조를 대립시키는 이른바 ‘거짓 이분법’이다. 이는 곧 대중이 기후변화를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멸종은 특정 종이 재생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개체 수가 주는 것이다. 생물 종으로서 호모 사피엔스가 그렇게 되진 않을 것이다. 고생태학자 커트 스태이저는 지구 평균 기온이 5~9도 올라도 인간종은 살아남을 거라고 봤다.

그래서 환경역사학자 줄리아 토머스는 인류 멸종에 대한 공포를 ‘문명 붕괴’의 공포로 번역해 읽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명이 붕괴하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일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상호 원조, 사랑의 가치 같은 것들이 온전하지 않은 시대에는 우리가 인간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가 육체나 유전자의 상실이 아니라 가치와 관계의 상실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빌 게이츠가 쏘아 올린 논란이 더 확장되길 원한다. 찰나의 폭발적 이미지, 세상이 임계점에 이르러 한번에 뒤집히는 것처럼 기후 변화를 종말론적으로 보는 것은 ‘재난 독재’로 이어지기 십상이며, 새롭게 떠오르는 시장을 선진국 정부와 자본이 선점해 지배하기도 좋다. 더불어 온실가스 배출량이나 온도 목표치 같은 숫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탄소 환원주의’는, 늦더라도 평등하게 가자는 ‘기후 정의’와 부딪힌다. 기후 대응은 때로는 풍력발전소 입지에 사는 산양과 돌고래 같은 비인간 동물의 권리, 최빈국 시민들의 잘살기 위한 열망과도 충돌하기 마련이다. 인류 멸종이라는 하나의 거대 담론은 이 복잡한 충돌을 덮어버린다.

오히려 내가 빌 게이츠의 글에서 느끼는 위험은 ‘기술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야’라는 굳건한 기술낙관주의였다. 1.5도를 지키기에는 좀 늦었지만, 기술이 발달하니 걱정 말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빌 게이츠는 말한다. 기후 변화의 단기적 목표치보다는 모든 사람의 삶의 질에 주목하자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시민이 부자 나라의 에너지 기업에 꼼짝달싹할 수 없이 포박된 탄소중립의 시대에 과연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의 부작용에 노출될 동물과 숲과 바다는 안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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