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내 통장이 '돈세탁 범죄'에 쓰였다 [추적+]

이혁기 기자 2025. 11. 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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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심층취재 추적+
아르바이트 위험한 유혹 1편
청년 겨냥한 대포통장의 함정
청년 알바 이용한 신종 범죄
선뜻 통장 내주면 돌이킬 수 없어
사이버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도

# 질 좋은 일자리를 좀처럼 찾기 힘든 세상.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숱한 청년이 하루에도 몇건씩 아르바이트를 뛴다. 그렇게 해야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할 수 있으니 방법이 없다. 이런 청년의 주변엔 '선한 사람들'이 많으면 좋으련만, 세상이 참 야속하다. 그들의 땀을 담보로 탐욕을 채우려는 꾼들이 되레 득실댄다.

# 이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위험한 시대가 됐을지 모른다. 위험의 깊이와 폭이 다를 뿐 해외 알바나 국내 알바나 다를 바 없다. 더스쿠프가 '알바, 위험한 유혹'을 연재한다. 그 첫번째 편, 대포통장의 덫이다.

일반인의 통장을 대포통장으로 활용하는 신종 범죄가 늘고 있다.[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통장만을 노리는 신종 범죄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피해자의 통장을 대포통장처럼 활용하는 방식인데, 피해자가 인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합니다. 워낙 수법이 은밀하고 교묘해 아직은 뚜렷한 대처법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더스쿠프가 이 신종 범죄를 취재했습니다.

한국인이 캄보디아에서 납치·감금 등 범죄 피해를 입은 사고가 공론화하면서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고수익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는 광고만 믿고 캄보디아로 출국했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미취업자나 아르바이트생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청년이 적지 않았는데,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번 '캄보디아 사태'가 취업난에 허덕이는 한국 청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돈이 궁한 청년'을 타깃으로 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엔 아르바이트를 찾는 '청년의 통장'을 타깃으로 삼는 신종 수법까지 등장했습니다. 청년의 통장을 보이스피싱·금융사기 등에 필요한 '대포통장'으로 악용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작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취업 준비생 양우희(가명·24)씨가 겪은 일을 들어볼까요? 대학교 졸업 후 오랫동안 취업이 되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우희씨는 2개월 전 구인구직 오픈채팅방에서 한가지 '솔깃한 제의'를 받았습니다. 간단한 서류 정리만 해주면 한달에 200만원을 벌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죠. 생활비가 급했던 우희씨는 '취업 전까지만 일하자'는 생각으로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우희씨에게 "일단 현금 전달 업무부터 하자"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가 우희씨 통장에 돈을 입금해줄 테니, 전액 그대로 회사 통장으로 송금해달라. 그러면 액수에 따라 건당 5만~10만원을 지급하겠다." 갑자기 업무가 바뀐 점이 조금 의아했지만, 우희씨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스피싱 사기꾼처럼 돈을 요구하는 상황은 아니니 별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우희씨 통장으로 150만원이 입금됐고, 우희씨는 상대방이 알려준 계좌번호로 이를 전액 송금했습니다. 그러자 또다른 계좌에서 우희씨 통장으로 5만원이 들어왔습니다. 우희씨로선 짧은 순간에 5만원을 번 셈이었죠. 상대방은 우희씨에게 "처음엔 하루에 1건 정도로만 작업을 진행하고, 익숙해지면 더 부탁할 수 있다"면서 "그러면 우희씨가 벌어가는 돈이 점점 늘어나는 거다"고 말했습니다.

[일러스트 | 게티이미지뱅크·더스쿠프 포토]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우희씨는 기분이 좋았지만, 찜찜한 점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럼 서류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하냐'는 질문에 상대방이 "할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면서 답을 계속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신의 통장을 거쳐서 돈을 보내는 이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후 5건 정도 일을 더 처리하고 우희씨가 받은 돈은 총 25만원. 수익이 괜찮았지만, 우희씨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우희씨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뀐 건 알바생의 통장을 대포통장으로 악용하는 범죄가 횡행하고 있다는 걸 인터넷에서 접하면서입니다.

범죄 사실을 알아챈 우희씨는 상대방과의 연락을 모두 차단한 뒤 경찰에 신고했습니다만, 우희씨의 통장이 어떤 범죄에 쓰였는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은 "일단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악용됐을 가능성은 무척 높은 상태다"고 말했습니다.

대포통장은 제3자의 명의를 도용해 통장의 실사용자와 명의자가 다른 통장을 의미합니다. 주로 보이스피싱 사기꾼들이 많이 사용합니다. 불법 도박이나 마약 밀매, 사기 등 다양한 범죄에도 쓰입니다. 자금 이동과 돈세탁 용도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대포통장이 각종 범죄의 도구로 빈번하게 활용되는 건 범인에게 '익명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언급했듯 통장의 명의자와 실사용자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현재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대포통장의 수는 어마어마합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인 한병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10월 12일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해 8월까지 적발된 대포통장은 총 5만491개입니다. 매년 평균 1만여개씩 대포통장이 만들어진 셈입니다. 이같은 제3자 명의도용 범죄로 경찰에 검거된 인원도 5년간 5만6466명으로 적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대포통장 개설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기술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5년, 금융감독원의 지시로 통장발급 요건을 강화한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신규 계좌를 개설할 때 급여명세서나 공과금 이체 확인서 등 각종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계좌개설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사진 | 뉴시스]

올해 3월엔 '비대면 계좌개설 안심차단 서비스'도 시행했습니다. 이는 개인이 신청할 경우,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비대면 계좌가 만들어지지 못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이를 통해 범죄 조직이 탈취한 개인정보로 몰래 계좌를 개설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죠.

경찰 역시 대포통장을 근절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습니다. 2021년엔 경찰청이 압수한 대포통장이 그해 전체 적발된 대포통장의 53.5%에 그쳤지만, 올해엔 비중이 86.6%까지 늘었습니다(1~8월 기준).

아르바이트를 빙자해 통장을 노리는 범죄가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이런 배경과 맞물려 있습니다. 정부 규제가 강화하고 대포통장 검거율이 늘면서 대포통장을 구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자, 일반인 통장을 악용하려는 시도가 늘어난 겁니다.

■ 문제① 간단함의 함정 = 문제는 '대포통장 알바 범죄'를 뿌리 뽑는 게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자진 신고가 사실상 유일한 대책이지만, 범죄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도 숱합니다. 피해자 입장에선 사실 '돈만 보내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간단한 데다 금전도 꼬박꼬박 들어오니, 돈이 필요한 이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피해자가 대포통장의 개념을 잘 모르는 미성년자이거나, 사리 분별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인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일례로, 지난 9월 28일 송파경찰서엔 '초등학교 6학년 자녀가 대포통장 범죄에 연루된 것 같다'는 진정서가 접수되기도 했습니다. 게임 오픈채팅방에서 만난 범인은 "통장으로 입금되는 돈을 내 계좌로 송금해주면 건당 1000 ~2000원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총 200만원을 송금받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문제②공범의 공포 = 또다른 문제는 대포통장 아르바이트를 한 피해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범'으로 엮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금융거래법에 따르면 대포통장 명목으로 통장을 제3자에게 양도하거나 대여할 경우, 최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이 부과됩니다.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계좌 정보를 제공하거나 전달하는 경우 역시 동일한 처벌을 받습니다. 대포통장 아르바이트를 가볍게 여겨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칫하면 통장을 대여해줬다는 명목으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인터넷 커뮤니티엔 우희씨처럼 대포통장 아르바이트를 했다가 대포통장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는 게시물이 적지 않습니다. '송금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통장이 정지를 당했다' '경찰로부터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등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포통장 아르바이트 범죄자를 잡아내기 어려운 원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공범으로 몰릴 수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 피해자가 자진 신고를 주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례의 주인공인 우희씨도 "경찰에 신고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다"면서 "혹시나 통장을 빌려줬다는 이유로 공범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털어놨습니다.

[일러스트 | 게티이미지뱅크]

조새한(법무법인 자산) 변호사는 "고의성이 없다면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있지만, 이런 법률 지식을 일반인이 알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금융사기 예방 교육을 수행하고, 피해자가 안심하고 신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르바이트는 한국 사회의 고용난이 빚은 또하나의 그늘입니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에게 '손쉬운 돈벌이' 제안은 달콤한 유혹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범행 수법도 점점 교묘해지고 있습니다. 워낙 수법이 은밀해 피해자가 자신이 범죄에 가담하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개인의 섣부른 선택까지 나라가 해결해 줘야 하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청년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건 개인의 문제로 보기 힘듭니다. '위험한 유혹'에 노출돼 있는 청년들을 위한 안전망을 만드는 것도 나라의 책무입니다. 우리도 이젠 '알바의 세계'를 점검할 때가 됐습니다.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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