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농촌] (5) 양평 설매재 억새밭서 마주한 영화 ‘관상’

박준하 기자 2025. 11. 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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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의 배후지에 가깝다. 지방 소멸이 현실이 된 지금,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농촌의 가치를 영화 장면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자 '영화 속 농촌'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작품은 2013년 개봉해 관객 900만명을 불러온 흥행 영화 '관상', 촬영지는 경기 양평 설매재다.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있는 설매재는 관상을 비롯해 수많은 사극의 배경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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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려도 매화가 피는 곳, 설매재
관상에선 주인공 김내경이 살던 집
가을마다 은빛 억새밭이 ‘절경’ 이뤄
인근 용문사 은행나무도 추천 명소
한국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의 배후지에 가깝다. 정책도 도시 기준을 변형한 수준에 그치고, 농촌 고유의 공동체 문화와 정서적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나곤 한다. 그러나 영화 속 농촌의 모습은 다르다. 스크린에서 농촌은 잃어버린 감성과 기억이 살아 있는 ‘문화적 보물창고’로서 역할한다. 지방 소멸이 현실이 된 지금,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농촌의 가치를 영화 장면 속에서 다시 발견하고자 ‘영화 속 농촌’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작품은 2013년 개봉해 관객 900만명을 불러온 흥행 영화 ‘관상’, 촬영지는 경기 양평 설매재다.

설매재는 ‘눈이 많이 내려도 매화가 피어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다. 영화 ‘관상’에서는 연홍이 초야에 숨어 지내는 김내경을 찾아가는 장소로 등장한다. 아스라한 고갯길에 자리한 탓일까.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있는 설매재는 관상을 비롯해 수많은 사극의 배경이 되어왔다. 관상을 비롯해 영화 ‘왕의 남자’, 드라마 ‘왕과 나’ ‘주몽’ ‘최강칠우’ 등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됐다.

운명과 선택의 갈림길, 관상
경기 양평 설매재의 ‘내경의 집’에서 팽헌(조정석)의 모습을 담은 영화 스틸컷. 네이버 영화
관상은 조선 초기 권력 다툼 속에서 인간의 운명과 선택을 그린 사극이다. 이야기는 노년의 한명회(우상전)로 시작된다. 권력을 쥐고 장수했지만, 그는 곧 목이 잘려 죽을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 그 불안의 근원에는 과거 만난 관상가 김내경(송강호)이 있다.

사람의 얼굴만 봐도 성품과 운명을 읽는 내경은 본래 평범하게 살고자 했으나, 동생 팽헌(조정석)과 연홍(김혜수)을 만나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김종서(백윤식)의 신임을 얻어 세자를 지키는 임무를 맡지만, 수양대군(이정재)의 야망을 막을 수는 없다. 내경은 끝내 가족을 잃고 한명회에겐 “목이 잘려 죽을 상”이라 예언한다. 훗날 역사에서 한명회는 사후 파묘돼 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는다.

관상은 얼굴에 드리운 ‘상’이 운명을 정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인간의 선택이 그 길을 만든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내경의 비극은 운명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과 선택의 무게를 강하게 각인시킨다.

설매재 ‘내경의 집’과 억새밭
‘내경의 집’이 있는 설매재는 무턱대고 찾기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오직 차량으로만 접근할 수 있으며, ‘설매재 자연휴양림’을 내비게이션에 찍고 가야 한다. 도착한 곳 무렵에서 뱀처럼 꼬불거리는 고갯길을 따라 배너미고개까지 더 오른다. 10분 정도 가면 매점과 ATV 오프로드 체험장이 나오는데, 이 둘의 사이로 난 산길을 따라가야 설매재로 갈 수 있다. 차량 차단기가 있지만 비상업적 목적으로 출입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곳은 ‘유명산’이라 불리며 이름처럼 등산객들에게 잘 알려졌다.

등산을 위해 설매재를 찾은 한상원씨(64·경기 수원)는 “능선이 아름답고 길목마다 억새를 볼 수 있어 초보 등산객에게도 좋은 코스”라며 “멀리서도 일부러 찾아올 만큼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경기 양평 설매재의 내경의 집. 지금은 폐허지만 억새와의 풍경은 여전히 장관이다. 강재훈 프리랜서 사진기자

설매재는 입구서 꼬박 30분은 부지런히 올라야 닿을 수 있다. 길가에는 붉게 물든 단풍과 은빛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며 길손을 반긴다. 갈림길에서 가운데 길로 들어서면 시야가 탁 트이는 공터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다시 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억새밭 사이로 너와집 한 채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영화 속 ‘내경의 집’이다. 집터에 서면 양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영화 속 연홍의 감탄처럼 절로 “공기 좋네, 경치 좋고”라는 말이 떠오른다.

운명을 개척하는 아들 진형을 설매재에서 응원하는 모습. 동생 팽헌과 내경(송강호). 네이버영화

이곳에서 내경과 동생 팽헌은 아들 진형(이종석)과 함께 살림을 꾸린다. 없는 살림에도 닭을 삶아 어떻게든 진형에게 잘 먹이려는 장면은 훗날 맞닥뜨릴 비극적인 결말과 대비돼 더욱 따뜻하고 행복하게 다가온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얼굴에 새겨진 ‘상’에 얽매인 듯 살아가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들의 삶은 결코 정해진 길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내경 역시 수많은 얼굴을 읽어내는 관상가였지만, 정작 자신의 운명 앞에서는 언제나 고민하고 망설인다.

설매재를 찾으러 가는 길목에 있는 은빛 억새. 강재훈 프리랜서 사진기자

설매재 억새는 바람이 불면 그 방향대로 흔들린다. 온화한 산들바람이 스쳐 가든, 세찬 칼바람이 몰아치든 한결같다. 어떤 바람에도 억새는 꺾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 지금은 폐허로 남은 내경의 집을 사람들이 굳이 찾아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흔들리면서도 그 자리에 꿋꿋이, 그리고 묵묵하게 남아 있는 억새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괜찮다’는 듯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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