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사는 세상] 하고 싶은 일 생길 땐 세가지…“궁둥이를 든다! 간다! 한다!”
농삿집 막내딸, 아버지 가르침에 서울로 대학까지
신문 속 한자 쓰며 놀던 덕에 중어중문학과 진학
교수 소개 중식당에서 알바로 시작해 셰프로
가족 만류에도 주방일 고집, 대만 유학길 올라
중국요리 강의 입소문, 방송국에서도 러브콜
오토바이 타고 전국 돌며 맛집 소개 ‘인기스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중년 여성 셰프가 대형 오토바이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전국을 누비는 EBS ‘신계숙의 맛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시청자들의 속을 뻥 뚫리게 했다. 인기에 힘입어 프로그램은 시즌 4까지 나왔고 신계숙 셰프(61)는 여러 방송에서 찾는 인기 스타가 됐다. 잠시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2021년 문을 연 중식당 ‘계향각’ 운영에 집중하기로 한 그를 어렵게 만났다.
“제가 농민의 딸이라 ‘농민신문’ 인터뷰는 하기로 한 거예요. 서울 중학교로 유학갔을 땐 아버지가 농사짓는 게 부끄러워서 직업을 ‘상업’이라고 쓰기도 했죠. 나중에 생각하니 참 후회되더군요.”
신씨는 충남 당진시 합덕읍에서 농사짓는 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들이 있음에도 아버지는 늘 “여자라서 더 배워야 한다”고 어린 딸에게 말했다. 그가 일곱살 때는 장에서 자그마한 칠판을 사다주며 “여기다 뭐든 쓰고 놀라”고 했다. 신씨는 방에 벽지 대신 발라져 있던 신문 속 한자를 칠판에 쓰면서 놀았다. 중학생 땐 오빠가 있는 서울로 유학을 갔다. 어려서부터 한자와 친했던 덕에 반에선 ‘한자 박사’로 통했다. 결국 그는 단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한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학과 교수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다.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고 했더니 교수는 “제자 중에 중국요리 하는 놈도 나오면 좋겠다”며 자신이 단골인 중식당의 홀 서빙 자리를 소개해줬다. ‘중식 대모’로 불리는 화교 이향방 대표가 운영하는 서울 서대문구 연남동의 ‘향원’이었다. 두달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신씨는 대학 졸업 후 오랜만에 향원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이 대표의 제안으로 다시 홀 서빙을 하게 됐다. 반년쯤 지나 그는 중식 요리사의 길로 들어설지 고민했다. 그가 고려한 것은 세가지. 여자 직업으로 괜찮은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답은 모두 ‘그렇다’였다.

“이향방 선생님에게 요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선생님도 여자였지만 중식당에서 여자가 요리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며 반대했죠. 한달을 애원한 끝에 주방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남자 주방장은 저에게 수도꼭지도 만지지 말라고 하더군요.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를 보면서 어이가 없어 속으론 웃었어요.”
텃세를 부리던 주방장도 할 일이 많다보니 신씨가 수돗물을 틀고 설거지를 해도 못 본 척하더란다. 주방장에게 한달 내내 커피를 타다주며 결국 요리를 배울 수 있게 됐다. 쏟아지는 주문, 뜨거운 불길. 주방 안은 그야말로 전쟁터 같았다. 어느 날은 탕수육을 튀기다 기름에 손목을 데었다. 함께 자취하던 친오빠는 상처를 보고 “부모님이 힘들게 서울로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중국집에서 뭘 하고 있냐”며 당장 식당을 그만두라고 화를 냈다. 신씨는 집을 나와 식당 근처 창고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주방에서 정신없이 일했다. 향원에서 일한 지 4년쯤 됐을 땐 더 큰 세상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전 재산을 털어 대만으로 가 요리를 배웠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향원에서 일하며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중국요리 강의를 하게 됐다. 시원시원한 입담으로 강의는 입소문을 탔고 대기업 문화센터 강의까지 진출했다. 대학원에 들어가 식품영양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따고 배화여자대학교 조리학과에서 중국요리를 가르치게 됐다. 신씨는 “어려서 아버지가 사준 칠판을 가지고 친구들과 학교 놀이를 했는데 그게 도움이 됐나보다”라며 웃었다.
50대 중반, 그는 또 한번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바로 할리데이비슨이다. 갱년기 증상 때문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너무 더워 내려야 했던 신씨는 스쿠터를 샀다. 스쿠터를 타다보니 좀더 멋있는 걸 타고 싶어졌고, 매장에 가 할리데이비슨에 올라타니 ‘여기가 바로 내 자리’라는 운명을 느꼈다. 그는 국내 최고령 여성 할리데이비슨 운전자가 됐다.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은 멋있다는 거죠. 가죽 점퍼를 입고 달릴 땐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헬멧 속으로 들어오는 꽃 내음은 또 얼마나 좋게요? 사람들이 물어봐요. 어떻게 그 어려운 일들을 해올 수 있었냐고.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딱 세가지만 지킵니다. 궁둥이를 든다! 간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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