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의 스승 서산대사와 지리산, 그리고 남명 조식
300여 년간 행방 묘연했던 내은적암 함양 마천 삼정산 자락 추정 터 발견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전국의 사찰에 격문을 띄워 승병을 일으켰다. 그가 남긴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오늘날 불교계에서 필독서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서산대사(1520~1604)는 지리산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평안도 출신의 그는 15세의 나이에 지리산에 유람을 왔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그 길로 승려가 됐다.
서산대사는 출가 이후 18년 동안 지리산 일대에서 수행에 정진했다. 지리산 곳곳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1560년부터 3년간 그가 머물렀던 작은 암자인 '내은적암(內隱寂庵)'이다. 신라말에 세운 작은 암자로 인적이 끊겨 터만 남아 있다가 서산대사가 40세의 나이 때 고쳐 지었다.
서산대사는 이곳을 자신의 호를 따, 마음을 비우고 맑고 깨끗한 상태를 뜻하는 '청허당', '청허원'이라고 불렀다. 스스로 '청허휴정'으로 자처한 것을 보면 이곳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서산대사 행보 시작점…내은적암
그동안 이 터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동군 화개면에 구전으로 전해져 온 곳이 있긴 했지만 이견이 있었다.
터의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조선을 대표하는 고승인 서산대사의 행보가 시작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다.
서산대사는 이곳에서 대표 저서인 '삼가귀감(三家龜鑑)'의 원본을 최초로 집필하고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이들 중 다수는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활약했다.
삼가귀감은 서산대사가 저술한 선가귀감, 도가귀감(道家龜鑑), 유가귀감(儒家龜鑑) 등 3권의 책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불교, 유교, 도가를 막론하고 선을 닦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을 모은 지침서다. 그런데 최근 함양에서 내은적암 터로 추정되는 새로운 장소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끈다.
손병욱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는 "문헌상 기록을 근거로 지리산 일대를 십수년간 탐방한 끝에 최근 함양군 삼정산 계곡에서 추정되는 터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서산대사 마음의 고향, 지리산
서산대사의 법명은 '휴정(休靜)', 법호는 '청허(淸虛)'이다. 오늘날 '서산대사(西山大師)'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묘향산 서쪽에 살았다 해서 붙여졌다.
서산대사는 말년에는 금강산과 묘향산에 머물렀지만, 그의 수행에서 지리산은 청·장년기를 보낸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례 화엄사에서 하동 의신마을 일대에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하동군은 2008년 '서산대사 유적지 복원 정비사업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통해 서산대사의 발자취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의 수행 기간 머물렀던 곳을 기리는 '서산대사길'이라는 옛길도 조성했다.
지리산국립공원에 있는 서산대사길은 하동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이어지는 4.2㎞의 구간이다. 화개천을 따라 서산대사가 수행했던 곳들을 거친다.
이번에 발견된 곳은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도마마을 뒤 삼정산 자락의 해발 400여m에 위치해 있다. 200~300평 남짓의 공간이다.
서산대사는 3년간 그곳에 머물렀지만 모두 16편의 글에서 언급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손 명예교수는 "문헌상의 기록에서 터에 관한 18가지의 단서를 찾아 냈다"고 했다.
서산대사의 문집, '청허당집'에 수록된 내은적암을 중수하며 지은 '내은적암 청허당 상량문'이라는 글에서는 터의 동서남북 및 상하 6곳의 지명과 특징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상량은 건물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지붕을 올리는 과정이다.
이에 따르면 터의 동쪽에는 '금계(金鷄)', 남쪽에는 학, 꽃과 관련한 지명, 서쪽에는 옥과 같이 생긴 산봉우리, 북쪽에는 참된 부처의 나라를 뜻하는 '진불국(眞佛國)'에 해당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삼정산 인근에는 이들 기록과 부합하는 지명과 장소가 그대로 남아 있다. 가령 동쪽에는 금계마을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으로 1㎞ 떨어진 곳에 운학정(雲鶴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손 명예교수는 "여러 기록과 현장검증을 토대로 해당 터가 맞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서산대사의 절친한 옥계 노진(1518~1578)이 함양 출신이고, 함양 유림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운학정을 세운 이는 노진과 동문수학을 했던 매촌 정복현이라는 사람이다. 서산대사는 1561년에 상량식을 하는데, 그 해에 운학정을 건립했다. 두 사람은 남명학파이다.

◇의병과 승병의 만남, 남명학파와 교류
서산대사는 지리산 일대에서 수행하며 남명학파인 경상우도(서부경남)의 선비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남명 조식 선생은 1501년생으로 서산대사와는 19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서로 시와 글을 주고받았다.
김경수 한국선비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남명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지만 불교를 배척하지 않고 불교계 인사와 폭넓은 교분을 했다"고 말했다.
청허당집 권 3의 '상남명처사서'에는 두 사람이 덕천의 강변 정자에서 직접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남명은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泗溟大師)와도 교류했다. 사명대사는 임란 직후 조선인 포로 송환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서산대사와 남명 선생은 서로 비슷한 기질을 지녔다. 현실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학풍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제자들은 의병장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 영남 3대 의병장이 모두 남명의 제자들이다. 남명에게는 그런 제자가 50명이 넘었다.
서산대사는 전국의 사찰에 격문을 띄우고 승병을 일으켰다. 그의 격문에 동참한 승려의 수가 5000여 명에 달했다. 서산대사는 73세의 고령에도 이들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 등 여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숭유억불의 시대, 서산대사와 남명은 학문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인품과 학식을 존중하며 포용하는 참 스승의 면모를 보여줬다. 후대에 존경을 받는 이유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사진 제공=이영규 전 교사
[인터뷰]손병욱 경상국립대 명예교수
"서산대사의 큰 가르침, 되새기는 장소로 활용해야"

서산대사는 말년은 금강산과 묘향산에서 보냈지만, 청·장년기는 지리산에서 수행했다.
조선에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기 위해서는 제자를 양성하고 그들의 수행에 도움이 될 저서가 필요했다.
십수년간 지리산 일대를 헤메고 다닌 끝에 함양 마천면 삼정산 산기슭에서 해당 터를 찾을 수 있었다. 불교 중흥에 나선 서산대사에게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먼저, 서산대사가 세운 청허당이 있었던 내은적암 터가 맞는지 사실 여부에 관해 검증을 해야 한다. 사실이라고 입증이 되면 어떻게 복원하고, 활용을 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서산대사가 머물던 당시에는 최소한 3동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염불과 참선을 가르쳤다.
제대로 복원해서 오늘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그런 장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그게 바로 서산대사의 뜻을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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