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근미래의 풍경] 딥페이크 시대, ‘인간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연기는?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시나리오 읽자마자 이건 내 거다, 내가 꼭 하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때가 자정 조금 넘은 시각이었는데 감독님한테 바로 전화를 걸었어요. 감독님, 저 이소은인데요, 이 역할 제가 하고 싶어요, 하고요.”
여배우의 말에 동영상 채널 운영자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감독과 주연 배우가 신작 스릴러 영화를 홍보하는 자리였다.
“감독님은 좀 당황하셨겠어요? 남성 캐릭터 역할을 여성 배우가 하겠다고 나섰으니?”
“그보다는 야밤에 전화가 와서 놀랐죠. 소은씨, 내가 지금 자다 깨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 우리 내일 낮에 제정신으로 다시 얘기합시다, 하고 끊었어요. 근데 누워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소은이야말로 지금 내가 찾던 사람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다음 날 제가 먼저 ‘소은 씨, 부탁해요’ 그랬어요.”
감독이 말을 받았다.
“이 캐릭터가 저한테는 흰 도화지처럼 여겨졌어요. 보면 여러 설정이 많아요. 엘리트 외교관인데 불륜 중이고 조직의 비밀을 알고 있고 국제적인 음모 한가운데 놓여 있고…. 그런데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이 어떤 마음을 품고 이런 대사들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할지는 전혀 모르겠어요. ‘와, 정말 잘하네’라는 말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감탄의 표현이 되기도 하고 비아냥거림이 되기도 하잖아요. 이 캐릭터의 모든 대사, 모든 행동이 그런 식이에요. 배우로서 정말 탐났어요.”
배우가 말했다.
“딥페이크 기술이 싸게 보급되면서 배우의 역할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전에는 이 업계에서 배우의 외모가 정말 중요했죠. 나이도 중요했고요. 이제는 그런 거 없습니다. 60대 여성 배우가 20대 남성 역할을 해도 딥페이크 때문에 겉모습은 전혀 어색함이 없어요. 중요한 건 20대 남자가 극중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표정을 지을지 60대 여성 배우가 이해하느냐죠. 이걸 대본을 읽고 머리로 파악해서 준비하는 두뇌파가 있고, 현장에서 감각적으로 멋지게 연주하는 본능파가 있어요. 소은씨는 두뇌가 일류이고 감각은 초일류인 배우예요. 영화 만들면서 제가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어요.”
감독이 거들었다.
“그러니까 중년 남성 역할을 30대 여성 배우가 맡는다는 사실은 장애물이 아니었군요?”
채널 운영자가 물었다.
“아무래도 남성의 경험은 남성 배우가 더 잘 이해하고, 여성의 경험은 여성 배우가 더 잘 이해하겠죠. 그런데 이 캐릭터의 핵심은 성별에 있지 않거든요. 영리함,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감, 윤리적 모호함, 육체적 단단함 같은 게 더 중요해요. 어떤 신화 속 동물이 카멜레온·표범·불곰을 합쳐 놓은 모습이다, 하는 설명을 들으면 그 동물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이 잘 안 가잖아요. 그걸 묘사한 조각을 봐야 알 수 있죠. 저는 소은씨라면 그런 조각을 만들어 줄 거라고 믿었던 거 같아요.”
“감독님 말씀이 정말 맞는 게, 영화 제작 현장이 많이 바뀌었어요. 아직도 배우라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 내 영화는 전부 그렇게 만든다고 고집하는 연출자도 있죠. 그런데 대부분은 디지털 세트에서 디지털 배우로 화면을 만들어요. 인간 배우들은 그 디지털 배우에게, 옛날 표현으로는 연기 지도를 하는 거고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봐요. 폭발 장면을 찍겠다고 화약 터뜨리고 건물 무너뜨리는 거, 시간 낭비 돈 낭비에 환경에도 안 좋거든요. 배우들이 분장하고 옷 갈아입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건 기술로 더 빠르게, 더 저렴하게 할 수 있으니까 기술에 맡기고, 인간 배우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인간 배우만 할 수 있는 일이 뭔가요?”
채널 운영자가 배우에게 물었다.
“그 캐릭터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거예요. 가짜 이야기인데 진짜인 것처럼 보여주는 게 영화의 본질이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데 진짜 사람인 것처럼 보여주는 게 연기의 본질이에요. 카메라 앞에서 어떤 얼굴 근육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건 그런 본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예요.”
“하지만 카메라 앞에서 어떤 얼굴 근육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순간이 있죠. 인공지능은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 할 수 있는 표정을 짓는 시간! ‘디지털 배우 아닙니다’ 인증 챌린지 타임이 왔습니다. 구독자 여러분, 저희 채널은 디지털 배우 출연 안 시킵니다. 진짜 인간 배우, 진짜 인간 감독들만 나와서, 직접 실시간으로 여러분과 소통하는 채널이에요. 아까 감독님이 보여주신 ‘명랑돼지 한잔 했네’ 표정이 그 사이에 쇼츠가 나왔네요. ‘좋아요’ 개수가 벌써 1만개를 넘었습니다. 이소은 배우님은 어떤 표정 준비하셨을까요?”
“저는 그로테스크 애교 3종 세트를 준비했는데… 아, 근데 이거 진짜 안 하면 안 돼요?”
배우가 울상이 되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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