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포럼] 가을의 소리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나는 코를 곤다.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제대하고 나서부터 그랬다고 식구들에게 들었다. 술 먹은 날은 더 심하다. 그래서 어디 단체 숙박할 경우는 되도록 피한다. 어쩔 수 없을 때는, 차라리 나보다 더 심하게 코 고는 사람을 찾아서 한방을 쓴다. 그러면 서로 덜 미안하니까. 그리고 밤새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아예 1인 2역으로 대화까지 할 정도다. 어떤 때는 옆에 자는 사람이 질문하면 대답까지 하면서 잔다고 한다. 낮에도 말을 시키면 그리 어눌한 편은 아니다. 한마디로 나는 낮이나 밤이나 별 영향력 없는 소리, 무의미한 소리, 소음공해만 내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므로 주변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고, 혼자 살고, 혼자 자는 게 딱 좋다. 바라는 바가 있다면 지속적으로 혼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
최근에 알았는데 ‘혀뿌리 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생소하지만 코골이, 수면무호흡이나 야뇨증이 있는 사람에게 좋다는 운동이다. 잠꼬대가 심한 경우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운동은 간단하다. 혀의 뿌리가 있는 곳이 뻐근할 정도로 최대한 혓바닥을 꺼내어 상하좌우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면 된다. 운동하는 동안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 그 많은 소리를 내뱉는 혀를 운동하는데 소리가 나지 않으니 신기하다. 그것도 뿌리에 힘을 주는데 고요하다니! 아무튼 생각나면 이 운동을 자주 한다. 3개월 이상 계속해야 효과 있다고 한다. 더불어 혀를 놀리는데도 주변에 소리가 나지 않으니 더욱 좋다. 다만, 운동 중에 남이 보면 흉측하다. 그래서 혼자 몰래 하는 것이 좋다. 들리지 않는 혀의 근육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갈수록 가을이 짧아진다. 봄도 느낄 만하면 더워지더니, 가을도 오자마자 추워진다. 간절기가 사라져 간다. 가을을 직감할 때는 늘 당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구나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은 11월이 오면 더욱 그러하다. 서로 손 잡고 앞을 보며 걸을 수는 있어도, 오롯이 서 있는 자아가 없다면, 평생 누군가에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시던 당신. 마당을 반으로 가로지른 빨랫줄을 홀로 버티는 키 큰 대나무 막대기를 가리키며 한 말씀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아무 소리 없이 주무시다가 자기를 책임지며, 서둘러 저 세상으로 가셨나요? 당신을 목 놓아 부르던 남은 사람들의 소리는 뒤로한 채. 그곳에서도 간절기가 사라지며 급히 추워지는 11월의 소리가 들리나요?
눈을 감으면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은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가만히 나를 부르는 소리에 집중해 보자. 개인적으로 일 년 중에 이 계절을 가장 좋아한다. 새싹의 꿈을 껴안고, 비지땀을 흘리며, 목마르게 갈망하던 그 무엇이 고요하게 결정을 내려주는 시간이다. 잘했든 못했든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견디며 살아냈다는 증거가 울긋불긋 물드는 계절.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다시 일어서던 시간들이 단풍잎처럼 매달려 있다. 더 좋은 일은 결국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복하게 쌓인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결국 평평하게 땅속으로 스며든다. 마침내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어딘가로 돌아가는 나의 발소리가 차츰 들리기 시작한다.
자다가 깼다. 숨 가쁜 코 고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떴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내 코골이가 나를 깨운 셈이다. 멀티탭 불빛만 희미하다. 혀뿌리 운동을 심하게 해서인지 목이 마르다.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다. 잠옷이 묵직할 정도다. 밤새 비 내리는 거리를 흥청망청 쏘다녔을까. 아니면 당신과 나란히 손잡고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나 혼자 물에 빠졌을까. 오 촉짜리 백열등을 켠다. 늘 두려운 새벽이 푸른 눈을 뜨고 먼저 일어나 앉아 있다. 오랜 시간 헤어졌어도, 낯설지 않은 손길이, 지금 내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식은땀을 닦는 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온다.
하헌주(시인·밀양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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