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 슈퍼위크가 끝나자마자 정쟁의 불길이 다시 타오를 것 같았는데, 한 자락이 사그라드는 모양새입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중지하도록 명문화하는 법안 얘기입니다.
민주당, "재판중지법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하루 만에 180도 선회
민주당은 오늘(3일) 당 지도부 간담회를 거쳐, '재판중지법'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재판중지법 입법(형사소송법 일부 개정) 추진을 사실상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된 어제 민주당의 기조가 불과 하루 만에 180도 뒤바뀐 셈입니다. 어제 민주당 수석대변인의 발언부터 보겠습니다.
"국정안정법(재판중지법) 논의가 지도부 차원으로 끌어올려질 가능성과, 이달 말 정기국회 내에 처리될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 기자간담회, 어제)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 (우측, 어제 기자간담회)
'가능성'이라는 말이 붙어 있긴 했지만 어제 당 수석대변인의 말은 재판중지법 공론화 방침으로 읽혔고, 민주당이 지도부의 결정을 거쳐 이달 안에 입법하려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민주당은 이런 방침이 국민의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 전에 기소된 재판 5건은 모두 중지돼 있는데, 지난달 31일 그 중 1건인 '대장동 사건' 1심 재판 결과가 나오자 보인 국민의힘의 반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에 대해 중형이 선고되자, 국민의힘이 이 대통령에 대한 재판도 재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 때문에 국정 안정을 위해서라도 재판중지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민주당의 논리였습니다.
"국민의힘이 이 대통령에 대한 5대 재판을 개시하라고 군불을 때니 민주당이 끓지 않을 수 없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 기자간담회, 어제)
'대장동 1심 판결' 아전인수식 해석이 논란의 도화선
정쟁의 불길은 민주당이 아니라 국민의힘이 군불을 때서 시작된 것이고, 민주당은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대장동 사건' 1심 재판 결과가 나오자,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자당에 유리한 대로 판결 내용 일부를 끌어다 주장을 펼쳤습니다. 먼저 민주당. 판결 내용 가운데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은 유동규 등과 민간업자의 유착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수용 방식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대목을 들고 나왔습니다. 민간업자와 유착 관계를 몰랐으니, 이재명 당시 시장은 대장동 일당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법원이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고, 기소 역시 명백한 정치 조작이었으니 이 대통령에 대한 공소를 즉각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 선고공판 출석 (지난달 31일)
반면 국민의힘.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에 대한 판결 내용 가운데, '성남시 수뇌부가 주요 결정을 하는 데 있어 민간업자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등 중간 관리자의 역할을 주로 담당한 측면도 나타난다'는 대목에 주목했습니다. 성남시의 수뇌부가 주요 결정을 했다고 하니, 당시 성남시장이었던 이재명 대통령의 연관성도 당연히 인정된 것이라는 주장을 폈습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오늘도 이재명 대통령 재판을 "오늘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공세를 이어갔습니다.
'대장동 사건' 서울지법 22부,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판단 안 내려
이렇게 이재명 대통령의 역할이나 책임에 대한 판단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는 것은 이 사건 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22부가 이재명 피고인에 대해서는 명시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부로서는 그런 판단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 사건을 다루면서 나름의 심증이 형성됐을 수 있지만, 이재명 피고인 사건은 다른 재판부인 서울지법 형사33부가 다루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형사22부가 배정되지 않은 피고인에 대한 판단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난달 31일 선고 이후 이달 1, 2일까지 사흘간 양당이 벌인 공방은 법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공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대통령 재판 재개 가능성' 서울고법원장 발언도 도화선
민주당이 어제 재판중지법 공론화 움직임을 보인 데는, 대통령 재판을 대통령 임기 중 재개하는 게 불가능한 것 아니라는 취지의 서울고등법원장 발언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대웅 서울고등법원장이 지난달 20일 국감에서 한 발언 내용은 이렇습니다.
-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 질문 "(이재명 대통령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파기환송심을 언제 마무리할 거냐. 공판기일을 추후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재명 정부 중에도 언제든 기일을 잡아서 할 수 있는 것이냐?"
= 김대웅 서울고등법원장 답변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 국민의힘 송석준 의원 질문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 김대웅 서울고등법원장 답변 "불가능한 건 아니다."
김대웅 법원장은 민주당 장경태 의원이 재차 질문하자, "현실 재판이 아니고, 이론적으로 재판이 (소추에) 포함된다는 견해도 있고,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는 것"이라며 원론적 답변이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헌법 84조는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訴追)를 받지 아니 한다'고 돼 있습니다. 소추, 즉 기소 대상이 안 된다는 조항인데, 이미 기소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재판을 어떻게 할지를 두고는 아직도 해석이 갈리는 상황입니다. 김대웅 법원장은 헌법 해석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소개했을 뿐이라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답변이 정치인들의 귀를 때렸을 것은 분명합니다.
대통령 기소 5건 재판, 대부분 '헌법 84조' 직간접 근거로 중지돼
대통령이 기소된 5건의 재판은 '공판 날짜를 나중에 정하겠고 그때까지는 재판이 열리지 않는다'는 이른바 '추후 지정' 형태로 중지돼 있습니다. 이 5건 가운데 재판부가 '헌법 84조'를 중지 이유로 명시한 재판은 2건으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과 대장동 사건 재판입니다.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혐의 사건과 쌍방울 대북 송금 혐의 사건 재판을 모두 맡고 있는 수원지법 형사11부는 이재명 피고인이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며, '대통령으로서 헌법 직무에 전념하고, 국정 운영의 계속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어 재판을 중지시켰습니다. 헌법 84조를 근거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헌법 84조를 해석해 재판을 중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1건인 위증교사 혐의 사건 재판부는 대통령 후보 시절에 '피고인의 대선 후보 등록'을 이유로 재판을 중지시켰습니다.
전체적으로 이재명 대통령 사건을 맡은 재판부들은 헌법 84조에 따라 '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은 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해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법에 대한 해석은 법관들에게 있는 것이어서, 재판부가 마음을 바꿔 '재판을 하는 게 맞겠다'며 재판을 재개한다고 한들 이를 제어할 방법은 없습니다. 더욱이 앞으로 해당 재판부를 구성하는 법관들이 교체되면, 기존의 '재판 중지' 방침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이 일부 민주당 의원들에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을 수 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장의 국감 발언이 논란을 부른 상황에서 대장동 사건 1심 판결 이후 국민의힘이 재판 재개를 들고 나오니까 재판중지법 공론화라는 민주당의 대응이 나온 것 같습니다.
'재판중지법 공론화' 방침, 왜 하루 만에 180도 선회?
그렇다면, 왜 불과 하루 만에 민주당 방침이 180도 선회한 것일까요? 민주당의 해명은 이렇습니다.
"관세 협상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성과, 대국민 보고대회 등에 집중할 때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박수현 민주당 수석대변인, 오늘)
아세안 정상회의를 전후한 외교 슈퍼위크의 성과가 전면에 부각되어야지, 정쟁의 불길 뒤로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외치 성과가 번번이 여당발 이슈에 묻힌다는 지적이 이어졌던 점을 감안한 판단으로도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기자들이 '대통령실에서 관련 요청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대통령실에) 당 지도부 논의 결과를 조율해 통보했고 그대로 수용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어제 공론화 방침에서 불과 하루 만의 사실상 철회. 그 사이에 여당 안에서 변수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대통령실의 의사'라는 변수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오늘 나온 대통령실의 입장도 그런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강유정 대변인은 민주당이 재판중지법을 처리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데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해당 법안이 불필요하다는 게 대통령실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 입장에 대해선 바뀐 바가 없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 오늘 브리핑)
대통령실 "불필요한 법안"…'대통령의 의중' 사실 공개
그 뒤에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좀 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대통령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재판중지법은 "불필요한 법안"이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헌법 84조에 따라 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재판은 중지된다는 게 다수 헌법학자의 견해이며, 헌법재판소도 같은 취지로 해석한 바 있다. 헌법상 당연히 재판이 중단되는 것이니 입법이 필요하지 않다."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 오늘 대통령실 브리핑)
강훈식 대통령실 비서실장 (오늘, 대통령실 브리핑)
이미 재판 5건이 중지돼 있고, 사법부의 전반적인 헌법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기정사실'로 두자는 취지로 보입니다. 만약 특정 재판부가 재판을 재개한다면, "그때 가서 위헌심판을 제기하고 재판중지법을 입법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강 실장은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민주당에 재판중지법안을 사법개혁안 처리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민주당의 공론화 방침에, 대통령실이 제동을 걸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강 실장은 "대통령을 정쟁의 중심에 끌어넣지 않기를 당부 드린다"고 하면서, '자신이 밝힌 대통령실의 입장에 대통령의 의중도 반영됐느냐'는 질문에 "대통령의 생각이 대통령실의 생각과 같다"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대통령이 제동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재판중지법 추진은 확실히 수면 아래로 내려간 것 같습니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도 '법안 처리를 미루는 게 아니라 아예 안 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재판중지법이라는 형사소송법 개정은 확실히 끝난 이슈일까요? 해당 법안은 지난 6월 민주당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뒤 본회의에 계류된 상태입니다. 여권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입법이 가능한 상태죠. 여권이 그런 마음을 먹는 상황이 온다면 재판중지법 논란은 얼마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을 따지려면, 이번 논란을 되짚어보면 되겠습니다. 우선 서울고등법원장의 국감 답변으로 촉발된 '법원에 의한 재판 재개' 가능성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판 5건을 맡은 재판부 가운데 어디서라도 '재판 중지' 방침을 바꿀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재판 지속 문제는 헌법에 명문의 규정이 없는 해석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관들이 다른 재판부의 이전 결정을 뒤엎는 결정을 잘 하지 않고 대개는 꺼린다는 점에서 재판 재개의 가능성이 크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강훈식 비서실장이 밝힌 대통령실의 판단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