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83] 염포, 소금밭이 자동차 공장으로 변한 땅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2025. 11. 2.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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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중 하나로 조선 바닷길 열어
소금밭 지세, 산업의 보고로 변모
염포산 정상 시가지 조망 포인트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가을빛이 짙어지는 시간이다. 울산의 지형에서 계절의 변화를 빠르게 느끼는 장소는 단연 울주7봉이지만 갯가도 변화에 민감하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밟아보는 땅 염포가 바로 그런 곳이다. 울산의 산업동맥을 펄떡이게 한 공장은 여럿이다. 이 가운데 세계의 모든 대륙에 엔진의 심장을 웅웅거리는 산업은 자동차다. 지금 세계 최고의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 땅 염포는 사실 한세기전 소금밭이었다. 신라 때는 하곡현(河曲縣) 관할에 있다가 고려 때는 지울주군사(知蔚州郡事), 조선시대에는 울산군(蔚山郡)에 속한 땅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울산군 방어진읍 염포리로 분류됐다가 울산이 시로 승격될 때 울산 염포동으로 지금에 이른다.

 지명에 염(鹽)자가 들어간 것으로 짐작하겠지만 염포는 오래된 소금밭이었다. 예로부터 이 땅은 소금밭이 많아 '소금 나는 갯가'라 불렸다. 지형상으로는 서북쪽에 태화강 하구의 하안평야가 있어 갯가와 산지로 둘러싸여 동해안에서는 드물게 염전이 펼쳐졌다. 울산의 염전은 지금의 천일염 방식이 아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의 고유한 소금 채취법이 이어진 땅이다. 바로 자염방식의 소금제조 기술이다,

 염포라는 지명 자체가 소금밭에서 유래했듯, 염포는 지형적으로 소금을 생산하기에 더없이 좋은 입지였다. 태화강 하구 아래로 동서로 길게 뻗은 지형과 드넓은 갈밭, 그리고 갯벌을 갖추고 있어, 갯벌로 들고나는 바닷물을 끌어올려 소금을 만드는 데 최적의 조건을 제공했다. 해방 전후까지도 이곳에서는 어업이 번창했으며, 부자가 많았던 마을로 알려졌다. 염포의 소금 생산은 특별했다. 큰 가마솥에 바닷물을 넣고 화목으로 달여 소금을 만들던 방식이다. 이를 자염이라 한다. 천일염과 달리 자염은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돼 특유의 달짝한 뒷맛이 일품이다. 이 때문에 조선조에 울산 소금은 전국의 장터마다 품귀였고 소금 상단의 물목 1순위였다.

 염포(鹽浦)는 자염의 생산지이자 국제무역이 이뤄진 항만이었기에 상단의 거래도 잦았고 왜인들의 출입도 잦았다. 그 당시 소금은 황금보다 귀한 물목이었다. 이 때문에 포구와 소금 생산지를 갖춘 염포는 교역의 중심지로 흥청거리던 항구였다. 일제 이후 천일염 제조법이 들어오면서 자염으로 1등급 소금을 만들던 울산의 소금밭은 효율성에 밀렸지만, 그 영화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소금밭이 사라진 것은 1962년 울산공업센터 출범과 함께였다. 소금밭을 밀고 세워진 자동차 공장은 세계 최대의 수출 품목으로 부상했다. 소금부터 자동차까지 이어진 교역의 역사를 연결하면 염포의 예사롭지 않는 땅의 역사가 펼쳐진다.

 염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왜와의 오래고 깊은 악연이다. 조선 초 삼포개항의 동해쪽 길목이었던 염포는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웅천의 제포(薺浦, 내이포)와 함께 왜인들의 왕래와 거주를 공식화했던 국제무역항이었다.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이 지역은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시됐으며, 조선은 초기부터 강경책을 통해 왜구 경략에 힘썼다. 강경책의 결과, 일본이 무역 재개를 간청하자 세종 8년(1426년)에 부산포를 개항해 왜인들의 거주를 허락했다. 그러나 점차 부산포에 상주하는 왜인의 수가 늘어나자 이들을 분산시키기 위해 세종 18년(1436년)에 염포와 제포를 추가로 개항했다. 당시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에 따르면 염포의 왜관 규모는 약 36호에 120명 정도였다고 한다.

 개항 초기에는 염포에 거주하는 왜인의 수를 60명으로 한정했으나, 세종 말기에는 부산포에 약 350명, 제포에 약 1,500명, 염포에 약 120명의 일본인이 상주하게 됐다. 이로써 염포는 왜국 사절이 서울을 갈 때 상륙해 언양, 경주, 안동을 거치도록 정한 좌로(左路)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염포는 단순한 무역항을 넘어 조선의 군사적 방어 기지로서도 큰 몫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염포진(鹽浦鎭)이 설치돼 수군만호가 주둔했으며, 태화강 하구에 위치해 개운포, 유포와 함께 울산 좌병영을 지키는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다. 문헌에는 이곳에 둘레 1,039척의 성이 있었고 성내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근처에는 가리산, 천내산 봉수가 설치돼 있었으며 동쪽 해안 지대에는 목장이 있었다. 

 자염 생산으로 소금밭으로 명맥을 이어온 염포는, 울산이 산업수도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드넓었던 갈밭과 갯벌은 메워지고,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인 현대자동차 공장이 들어섰다. 소금밭을 잃은 염포 토착민들은 사라진 소금밭이 회한으로 남지만 여기에 들어선 자동차 공장은 이제 울산은 물론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공장으로 우뚝 서 있다

 염포에서 빠질 수 없는 뒷배는 바로 염포산(鹽浦山)이다. 해발 203.4m의 이 산은 울산 동구와 북구 염포동에 걸쳐있으며, 산 이름 역시 울산 소금 생산의 중심지였던 염포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도심 속 자연 휴식 공간이자 도시 자연공원으로 잘 정비돼 있다. 염포산 정상 부근의 동축산 정상에 위치한 팔각정(혹은 염포정, 오승정)에 오르면 울산 시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펼쳐지는 울산의 공단 야경은 황홀경을 빚어내 '울산 12경' 중 하나로 꼽힌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염포의 옛 이야기와 전설이 담긴 공간들을 만날 수 있다. 동축재에 올라서면 울산 전역이 발아래 모여드는 '전망의 최고봉'이라는 외소나무의 전설이 전해진다, 정월대보름 때 달집을 태워 소원성취를 빌던 영험한 장소였다. 여인의 잘록한 허리를 형상화해 이름 붙여진 '어슴길', 명당에 안치된 무덤을 폐장한 장소라는 토종 명칭 '파굼터' 등 옛 이야기를 품은 장소가 여럿이다.

   마지막 팁 하나, 지금은 자동차 공장이 들어선 염포는 사실 제철공장 부지로 지목된 땅이었다. 공업센터 추진 당시 막대한 자금줄을 잡지 못한 박정희 정부가 제철공장 기공이 늦어지자 포항을 점지한 박태준이 제철차관을 끌어들여 제철소를 포항에 가져간 까닭에 염포는 자동차 산업의 1번지가 됐다. 순서가 바뀌었다면 염포는 철강도시의 심장이 될 뻔 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