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엽수: 별것 아닌 일을 별것으로 만드는 재미

한겨레 2025. 11. 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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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의 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천리포수목원의 붉은꽃칠엽수 ‘브리오티’가 활짝 꽃을 피운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매년 10월에는 영국 중부 노샘프턴셔의 작은 마을인 사우스윅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다. 바로 ‘콘커’를 깨뜨려 우승자를 가리는 ‘세계 콘커스 선수권 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다. 콘커는 칠엽수 나무의 동그란 열매를 뜻하는데, 콘커스 게임은 끈에 매달린 이 열매를 번갈아 가며 내려쳐 먼저 깨뜨리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1965년의 어느 날, 날씨가 너무 나빠 배를 띄울 수 없던 영국 어부들이 술집에 모여 콘커스 게임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이 대회는 60년이 지난 지금 매년 세계 각지에서 약 400명의 참가자가 모이는 대규모의 대회가 됐다.

무료한 낮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게임이 세계 선수권 대회로 자리 잡기까지 혁혁한 공을 세운 주인공이 바로 칠엽수다. 무환자나무목 칠엽수과에 속하는 큰키나무인 칠엽수는 그 이름처럼 5~7개의 잎이 마치 손바닥처럼 가지 끝에 둥그렇게 모여 나는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어 한번만 눈에 익히면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초여름 흰색 꽃이 원뿔형의 모양으로 가지 끝에 달리는데, 꽃잎보다 길게 빠진 수술과 분홍빛 반점이 더해진 화려한 꽃차례의 모습은 마치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거꾸로 달아둔 것처럼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리포수목원 교육연구 구역에 있는 칠엽수. 잎이 5~7개라서 칠엽수라고 부른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일본 원산의 칠엽수는 열매의 겉껍질이 매끈한 반면 서양칠엽수 또는 가시칠엽수로 불리는 유럽 원산의 칠엽수는 열매 바깥면에 오돌토돌한 가시가 나 있다. 교육연구용으로 관리하는 수목원의 비공개 정원에는 높이가 10m 이상인 거대한 칠엽수를 볼 수 있는데, 가을비가 쏟아진 다음날이면 탁구공 크기의 칠엽수 열매가 나무 아래로 후두둑 떨어져 굴러다니는 모습이 참 재미있다. ‘밤’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마론’에서 따와 칠엽수를 ‘마로니에 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칠엽수의 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말발굽의 모양과 비슷해 ‘말밤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칠엽수 열매는 밤과는 달리 인체에 해로운 독성 물질이 들어있어 주의해야 한다.

칠엽수의 열매. 껍질 안에 밤과 비슷한 열매가 들어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천리포수목원에서는 큰키나무가 모여 있는 우드랜드에서 미국칠엽수 ‘루브라’를, 유리온실로 내려가는 데크 계단에서 미국칠엽수와 가시칠엽수의 교잡인 붉은꽃칠엽수 ‘브리오티’를 찾아볼 수 있다. 각각 수목원 조성 초기인 1973년, 1977년 미국과 뉴질랜드의 양묘장에서 들여와 지금까지 키운 개체다. 5월 초부터 화려한 꽃을 피우는 붉은꽃칠엽수는 잎자루와 꽃자루부터 붉은색을 띠며 오묘하고 독특한 색감을 선보인다.

천리포수목원의 붉은꽃칠엽수 ‘브리오티’가 활짝 꽃을 피운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칠엽수는 한번 자리만 잘 잡으면 비교적 손이 덜 가는 나무에 속한다. 배수가 잘되는 토양에 심고, 땅이 너무 건조하지 않게만 관리해주면 된다. 다만 수세가 쇠약해지면 곰팡이로 인한 잎마름병이 발생하기도 하고, 한여름 대도시의 뙤약볕에 잎끝이 타들어 가는 엽소 현상도 흔하게 생길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유럽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가시칠엽수는 지난 2019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멸종 위기 적색 목록의 ‘취약’ 등급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해충 피해, 세균병뿐만 아니라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 등으로 인해 개체 수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도 고려한 것이다.

천리포수목원 교육연구 구역에 있는 칠엽수. 천리포수목원 제공

식물을 공부하며 꼭 가보고 싶은 곳은 구글 지도에 표기하며 동시에 최적의 방문 시기를 함께 기록해두곤 하는데, 최근 이 리스트에 10월의 영국 노샘프턴셔도 올랐다. 그저 유럽의 울창한 칠엽수 아래에서 펼쳐지는, 이 소소하면서도 활기 넘치는 콘커스 선수권 대회를 관람하고 싶다는 이유 단 하나에서다.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손의 고정된 움직임, 집중력, 그리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는 참가자들의 눈빛이 지나치게 또렷하다. 아주 살짝 돌아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받는다. 개최 60주년을 맞아 지난 10월12일 열린 세계 콘커스 선수권 대회의 우승 트로피는 대회에 처음 참여한 영국 출신의 한 남성이 차지했다. 올해 역사상 가장 무덥고 건조한 여름을 보낸 영국에서는 칠엽수 열매가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떨어져 경기 진행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조직위원회는 영국 왕실 소유의 윈저성을 포함해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튼실한 칠엽수 열매를 기부받아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천리포수목원 교육연구 구역에 있는 칠엽수 아래 열매가 굴러다니고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60년간 대회에서 모금한 약 43만파운드의 기부금은 시각장애인들을 후원하는 데에 쓰였다. 무언가에 조금 돌아 있는 사람들이, 자칫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일을 별것으로 만드는 일. 거기에 타인을 향한 배려와 친절함을 잊지 않는 것이 세상을 조금 더 재미있는 곳으로 만든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이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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