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혈통 두 학자, 예술로 세계와 만나다

“낮에는 과학 연구로 전후 한국을 재건하고 밤에는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번역하며 삶의 의미를 탐색한 겁니다. 지성으로 예술을 창조하는 화가들에 몰입하며 그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전쟁으로 무너진 한국도 견뎌낼 수 있었을 겁니다.”
이북 출신 2세로 르네상스 미술사를 연구하는 데이비드 영 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미술사학과 교수(48)는 지난달 21일과 24일 이화여대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린 강연에서 역시 북한 출신인 고(故) 이근배 전 조선대 의대 교수(1914~2007)를 이렇게 소개하며 눈물을 흘렸다. 킴 교수는 “이 교수와 나는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모두 북에 뿌리를 둔 사람으로서 언어와 정체성의 경계를 넘으려 했다”고 했다.
킴 교수는 “이 교수가 동아시아 최초로 조르조 바사리의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을 완역하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이 근대 지성의 세계로 들어섰다”고 했다. 바사리는 16세기 이탈리아 화가이자 건축가로, 1550년 동시대 예술가 200명의 생애와 작품을 정리한 ‘평전’을 펴냈다. ‘르네상스(rinascita, 고대의 재생)’ 개념이 처음 등장한 이 책은 서양미술사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바사리가 이 책을 저술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사를 연구하는 사가들은 아직 암흑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대로 평가받는 르네상스는 바자리의 책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평양 출신인 이 교수는 일제강점기 나가사키 유학 시절부터 낮에는 생화학을 연구하고 밤에는 번역에 몰두했다. 일본어·독일어·프랑스어를 익혀 근대 학문을 접했고, 프랑스 학자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韓國書誌)‘를 번역하다 일제 경찰의 수색을 피해 중국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한 그는 한국원자력연구소 생물학연구실에서 근무하며 과학자로서 전후 복구에 힘썼다.
이 교수는 1960년대 하버드 의대 유학 중 2000쪽 분량의 가스통 드 비어가 번역한 영어판 바사리 평전을 구했다. 그는 귀국 후 18년에 걸쳐 완역 작업을 이어갔다. ’돈이 되지 않는 연구서‘라는 출판사들의 거절 속에서 번역을 묵히던 중, 탐구당이 1986년 세 권짜리 초판 500부로 이 교수의 번역을 출간했다. 2018년 한길사는 컬러 도판을 첨부해 이 교수의 번역을 재출간했다. 번역 강국으로 자부하는 일본은 2022년에야 ’평전’ 완역본을 출간했고 중국은 아직 번역 작업이 진행 중이다.

킴 교수도 이 교수와 같이 이북 출신으로, 이곳 저곳을 떠돌며 공부하고 번역하던 이 교수에게 쉽게 공감했다고 한다. 킴 교수의 외가는 북한 대지주 출신으로 공산당에 재산을 몰수당한 뒤 6·25 직전 서울로 피란했다. 이후 킴 교수의 부모는 돈을 벌기 위해 브라질 상파울루로 이주하고 다시 미 미시건으로 이주해 킴 교수를 낳았다.
당시 이주 한인들 중 다수는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부정하던 시절로, 킴 교수의 아버지도 “한국어는 필요 없다”며 어린 킴 교수에게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킴 교수의 어머니는 영어가 서툴러 가족 간 의사소통도 어려웠고, ‘한국어’는 킴 교수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한다. 킴 교수는 “영어·라틴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를 쉽게 배웠지만 한국어만큼은 심리적 스트레스 때문에 잘 배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킴 교수는 지난 주 한국에서 영어로 강연을 진행하면서 “내가 한국어로 이 강연을 진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며 가슴을 치기도 했다.

킴 교수가 이 교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2002년, 박사과정 입학을 앞두고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던 시기였다. 외삼촌이자 이 교수의 동료였던 이창건 전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장의 서재에서 이 교수가 번역한 ‘평전’을 발견한 것이다. 킴 교수는 그해 3월 외삼촌과 함께 이 교수를 만났던 일을 이렇게 기억한다. “과학자인 당신이 왜 그렇게 절박하게 바사리를 번역했는지 너무나 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를 잘 못한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바닥만 보고 있었지요. 지난 23년간 그 질문은 계속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이제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킴 교수는 1999년 미국 엠허스트대에서 어문학 학사, 2009년 하버드대에서 미술사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펜실베이니아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4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여행하는 예술가’로 미 의회 선정 ‘올해의 책’과 랄프 왈도 에머슨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곧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지원으로 이근배 연구가 포함된 ‘다국어 번역을 통해 본 글로벌 미술사’를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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