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의 20년 전 추억이 떠올랐다

정동현 음식 칼럼니스트 2025. 11. 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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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생대구탕

생대구탕이 팔팔 끓었다. 주인장은 테이블 끝에서 뚝배기 국물을 대접에 옮겨 담았다. 맑으면서도 하얀 국물을 떴다. 그 순간 친구들과 떠났던 속초 여행이 떠올랐다. 겨울이었고 여행 내내 몸을 떨어가며 추위를 견뎠다. 군대 가기 전 돈을 모으고 시간을 짜내 떠난 여행이었다. 셋이 돈을 합쳐도 회 한 접시 먹기가 빡빡했다. 빨간 등대 밑에 앉아 민박집에서 빌려온 통기타를 치며 놀았다. 손이 얼어 기타를 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허기가 졌다.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 들어가면 여기가 속초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어김없이 생선국이 나왔다. 생선 토막 하나 들어 있는 맑은 국이었다. 하지만 막상 먹고 나면 기름지고 뜨끈한 맛이 신기할 정도로 온몸 가득 퍼졌다. 그것이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신논현역에서 내려 언덕을 오르고 비탈을 내려가니 ‘노들강본채’라는 간판이 보였다. 오래된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누군가는 해외 주재원이, 누군가는 스스로 사장이 됐다. 바빠서 못 보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예전 같지 못한 모든 것에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서울 강남구 노들강본채의 생대구탕.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남도 음식 전문이라는 이 집 메뉴는 해산물과 고기 요리가 적당히 섞여 있었다. 찬이 먼저 깔렸다. 갈치 새끼인 ‘풀치’, 애호박 볶음, 달걀찜, 손으로 쭉쭉 찢은 소고기 장조림이 반가웠다. 각각 간과 맛이 달라서 질리지 않았다. 반찬 맛을 보다가 홍어 삼합을 먼저 시켰다. 문이 드르륵 열렸을 때 ‘좋네’라는 추임새가 절로 나왔다. 분홍색으로 물든 홍어 지느러미 살이 가지런하게 접시 위에 올라 있었다. 홍어 삭힌 향이 부담스럽다던 친구도 젓가락질을 몇 번이나 더 했다. 잡내가 있거나 마른 부분 없이 촉촉하게 삶은 삼겹살 수육은 한 점 한 점 사라지는 게 아쉬웠다. 푹 익은 김치는 달지 않고 짠맛만 간간하게 남아 다른 음식을 곁들이기 좋았다.

육고기 중에 하나 고르려 하니 주인장이 육사시미를 꼽았다. 전라도에서 막 올라왔다는 생고기는 핏빛 검붉은 색이었다. 입에 넣으니 마치 떡을 먹는 것처럼 쫄깃했다. 처음에는 쇠를 핥는 것처럼 서늘한 맛이, 그 후에는 조금씩 달달한 맛이 퍼졌다. 마늘과 참기름을 뿌린 고추장에 찍으니 생고기의 내성적인 맛이 더 활짝 펴졌다. 차가운 음식을 먹었으니 그다음은 뜨끈하고 매콤한 병어조림이었다. 어른 손가락 두 개를 겹쳐 놓은 것처럼 몸통이 두툼한 병어는 어른이 한 토막씩 나눠 먹어도 양이 넉넉했다. 빨간 양념은 범상치 않은 색과 다르게 과하게 맵지 않아서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입맛이 상하지 않았다.

서서히 배가 불러왔다. 밤이었고 밖으로 차가운 바람 소리가 났다. 조금씩 들리는 빗소리 탓인지 고른 것은 모둠전이었다. 주문을 받는 주인장이 “홍어도 넣을까요?”라고 짧게 물었고 나는 얼떨결에 “네”라고 답했다. 부치자마자 나온 홍어전을 멋도 모르고 입에 넣었다. 저절로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헉헉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른 친구가 이어 홍어전을 먹었고 역시 몸으로 반응했다. 달고 짜고 신, 오미(五味)에 속하지 않는 맛이었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홍어 맛이 열을 받아 더 강렬해졌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꽤 오래 건강 이야기를 했다. 요즘 먹는 영양제와 약을 주식 종목 추천하듯이 진지하게 떠들었다. 이렇게 끝내긴 아쉬워 마침내 시킨 것이 생대구탕이었다. 지리의 하얀 국물에 커다란 대구 한 토막과 수컷의 정소인 이리가 한 움큼 들어가 있었다. 하얀 국물은 눈물처럼 맑다가도 숟가락으로 휘저으면 눈보라가 몰아치듯 뿌옇게 흐려졌다. 칼칼한 국물은 식도를 시작으로 내장을 시원하게 훑고 내려가면서 입에는 기름지고 고소한 뒷맛을 남겼다. 그리고 오래전 그날 겨울 동해와 늘 짠맛이 감돌던 속초의 바람과 속 깊은 냄비에 담긴 미끈한 생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주인장은 “좀 더 추워지면 강원도에서 커다란 놈이 온다”며 오늘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때로 오늘이 아니면 영원히 없을 수 있다. 힘겨웠던 젊음은 사실 봄철 꿈이었고 중년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연옥(煉獄) 같다. 또 확실하다. 나는 너희와 함께한 모든 날을 어린아이처럼 그리워하며 그렇지 못한 모든 날을 어른처럼 견디고 또 견딜 것이다.

#노들강본채: 홍어삼합 소 7만원, 육사시미 6만원, 병어조림 6만원, 생대구탕·지리 중 5만5000원, 02-517-6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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