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청첩장엔 6개가 빼곡히... 경조금 계좌번호, 이대로 좋습니까
‘마음 전하실 곳’
K 계좌번호 논란

어느새 당연해졌다. 너도나도 한다. 안 하는 사람이 이상해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가끔 ‘이게 맞는 건가?’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유력 정치인이나 관료가 그걸 했다는 뉴스를 보면 분노의 불길이 확 붙는다. 어쨌든 찜찜한 일이라는 방증이다.
경조금 받는 은행 계좌번호 이야기다. 인륜지대사인 결혼 청첩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아이 돌잔치 초대장에 ‘마음 전하실 곳’이라며 빼곡히 적는 그 숫자.
요즘 모바일 청첩장엔 신랑·신부와 양가 혼주 명의로 4~6개의 계좌번호나 카카오톡 송금 버튼이 줄줄이 달린다.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처럼 카드 결제 기능도, QR 코드도 넣을 수 있다.
과거 관혼상제 때 음식을 나누고 품앗이하던 상부상조 정신은 일정액의 현금 부조로 대체됐고, 계좌번호를 주고받으며 축하든 애도든 빠르고 편하게 계산하도록 진화했다. 외국에선 드문 자본주의의 끝판왕, 경조사용 ‘K 계좌번호’를 둘러싼 복잡한 한국인의 마음을 설문조사와 함께 들여다봤다.

과반이 “편해서 좋다”, 그런데…
청첩과 부고에 혼주나 상주의 계좌번호가 처음 등장한 건 1990년대 후반이다. 망측하다며 언론사에 제보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과 5년 전까지도 흔치 않았다. “자식 청첩장을 세금 고지서로 만드네” “모친 별세 소식 바로 밑에 계좌번호를 적다니, 안타까운 마음마저 싹 사라지더라”는 뒷말이 나오곤 했다. 여전히 결혼과 죽음은 정중하게 알리고, 직접 찾아 마음을 표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 2020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비대면 문화가 퍼지며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직접 못 가니 송금이라도’가 대세가 되자, 계좌번호를 적어주는 게 새로운 예의가 됐다. 이는 코로나가 끝나도 강력한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모바일 청첩·부고의 95%에 계좌번호가 달린다.
사람들 인식은 어떨까. ‘아무튼, 주말’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와 함께 지난달 24~27일 전국 성인 1501명에게 물었다. 경조금 계좌번호 공개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답변이 53.4%로 과반이었다. 연령이 높을수록 찬성이 많았다. 경조사 치를 일 많은 60대는 65.7%에 달했다. 반면 2030세대는 좋다는 비율이 각각 46.7%, 48.3%로 뚝 떨어졌다.

긍정적으로 보는 이유론 ‘직접 가거나 봉투 챙길 필요 없어서’ ‘돈 받아야 할 당사자에게 정확히 갈 수 있어서’ 등 편의성이 압도적이되, ‘남들이 다 하니까’ ‘결혼·상조업체에서 시켜서’라는 대세지향성도 꼽혔다.
부정적이란 답은 22.1%였다. 그런데 “모르겠다”(24.5%)고 답변한 이들에게 추가 질문을 했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절반 정도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젊은 층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사실상 부정적 의견이었다. “편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다” “삭막하게 느껴지지만 다들 하니 시대 변화로 받아들인다” “계좌번호는 적어도 찜찜하고 안 적어도 찜찜” “너무 돈돈 하는 세상” “경조사는 가족끼리만 치렀으면 좋겠다”…
돈 거래처럼 변질된 결혼·장례 문화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쏟아졌다. 응답자 약 3명 중1 명은 계좌번호 공유에 어떤 식으로든 불편함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됐다.
새로운 예의냐, 갈등 유발자냐

경조금 계좌번호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 들춰보면 은근히 많다. 정확히 말하면 계좌번호 덕에 너무나 쉽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된 돈의 액수나 향방을 둘러싼 갈등이다.
결혼을 앞둔 A 커플이 모바일 청첩장을 돌렸다. 신랑 친구가 축의금 50만원을 실수로 신부 측 계좌로 보냈다. 뒤늦게 안 신랑이 넌지시 얘기했지만, 신부 부모가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신랑은 “처가가 앞으로 모든 일을 이렇게 할 것 같다”며 파혼을 선언했다.
또 다른 B커플은 양가 도움 없이 대출을 받아 결혼했다. 모바일 청첩장엔 누구의 계좌도 넣지 않기로 했는데, 슬그머니 시부모 계좌번호가 들어갔다. 시부모는 “혼주가 받아 계산할 몫이 있다. 어차피 다 너희 줄 것”이라고 했지만 그 계좌로 얼마가 들어왔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 일로 신혼부부가 싸우다 역시 이혼으로 치달았다.
회사원 C씨는 사촌형의 장모상 부고에 적힌 상주의 대표 계좌로 부의금 수십만원을 보냈지만, 사촌에게서 수개월간 어떤 인사도 받지 못했다. 그는 “상주가 명단을 정리해 알리지 않은 건지 궁금하지만, 먼저 묻기도 그렇더라”며 “앞으론 계좌가 아닌 카톡으로 송금 내역을 남겨 고맙다는 문자라도 받아야겠다”고 했다.
공직자 D씨는 최근 친한 동료의 잇따른 계좌번호 공개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5년 전 결혼식 때 모바일 청첩장에 적힌 계좌로 두둑한 축의금을 보냈고 1년 전 부모상에 부의를 전했는데, 그 동료가 지난달 가족상 부고에 또 계좌번호를 알린 것. D씨는 “경조사는 본인 선택이 아니지만, 매번 업체가 시키는 방식으로 알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코로나 때 계좌번호 연결 문구로 유행한 “멀리서 마음만 전해주셔도 큰 힘이 됩니다” “참석이 어려운 분들을 위해 삼가 안내 드립니다”는 전가의 보도가 됐다. 60대 퇴직자 E씨는 “동창이 딸이 스몰 웨딩을 한다며 ‘잔잔하고 소박한 삶’ 운운하는 청첩장을 보냈는데, 장소·날짜도 없이 계좌번호만 적혀 있어 기가 막혔다”고 했다. 또 “장례(혹은 돌잔치)는 직계가족끼리 치른다”면서 계좌만 알리는 경우도 늘었다.
이에 대해 “내가 받은 부조금에서 식대 빼고 갚으면 되니 편하다”는 반응도 있지만, “넌 오지 말고 돈만 보내라는 거냐”는 뒷말이 나오기 십상이다.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과 유럽에선 경조사에 대놓고 금전을 개입시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통상 결혼하는 커플에겐 생활용품을 선물하고, 장례 땐 꽃과 추모 카드, 음식을 전하거나 고인과 관련된 단체에 기부한다.
아시아 일부 국가에 현금 부조 문화가 있지만 특별한 사이에 큰돈을 보태는 식이지, 계좌번호를 불특정 다수에게 뿌리는 일은 드물다. 일본에선 행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전용 봉투도 없이 돈만 우편으로 보내는 건 큰 실례로 여긴다고.

권력자의 계좌번호에 분노 폭발
한국은 현금 부조, 그것도 온라인 송금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관행이니 괜찮다’는 것도 평등한 관계인 민간인끼리일 때 얘기다. 께름칙하던 민심은 유력 정치인이나 상급자 등 ‘갑’이 은행 계좌를 여는 순간 폭발한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은 국정감사 기간인 10월 18일 국회에서 딸의 결혼식을 열었다. 모바일 청첩장에는 한때 딸 명의 계좌번호와 카드 결제 기능이 들어 있었다. ‘엄마의 을’인 기업이나 피감기관이 화환 100여 개를 보내고, 축의금도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논란 와중인 26일 우상호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의 아들 결혼식에도 아들 명의 계좌번호가 돌았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직후인 6월에도 그의 장남이 삼청각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열면서 계좌번호는 공개했는데, 이 계좌로 얼마가 들어왔겠느냐를 두고 구설이 나왔다.
개딸들은 “전 국민이 하는 걸 대통령 아들만 하지 말란 거냐”고 엄호했다.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계좌번호 공개를 마치 불가항력의 자연현상처럼 말한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면서.

앞서 모친상에 조문은 안 받는다며 계좌번호를 뿌린 강원도 태백시장, 아들 결혼 때 수천 명에게 계좌를 알린 전남 장흥군수, 모친상 부의 계좌를 단톡방에 올린 천안 시의원, 구청 내부통신망에 아들 청첩장을 올린 부산 서구청장도 도마에 올랐다. 이들은 검찰이나 국민권익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공무원 행동강령 17조엔 “공무원은 직무 관련자나 직무 관련 공무원에게 경조사를 통지해선 안 된다”며 “지인에게서 부조금을 받더라도 김영란법에 따라 5만원 이내로만 받을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상위 법률엔 경조금에 대한 구속력 있는 규정이 없어, 사실상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의 합법적 수금 창구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26 신춘문예] 시·소설 예심 심사위원 심사평
- 만원 열차 바닥에 앉아 과제하던 학생…英 왕실 서열 17위 공주였다
- 英박물관도 털렸다…유물 600점 턴 용의자 4명 CCTV에
- [더 한장] 교정이 들썩, 방학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
- [그 영화 어때] 라멘 영화가 어쩌다 청불이, 40년 만에 첫 개봉하는 ‘담뽀뽀’
- [5분 칼럼] 통일교 천정궁
- KT 연말 소상공인 지원 캠페인… 쿠폰·마케팅 지원
- 美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韓 기업 설명회 참가자 66%가 외국인... “기업들 활약 덕분”
- 셀트리온이 택한 바이오텍, 신약 개발에 AI를 활용하는 법
- ‘저녁형 인간’은 없다...밤 11시 이전 잠들어야 건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