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이 가득 찬 자리에서, 세계는 다시 밝아진다” 허윤희, 존재의 시간을 그리다

제주방송 김지훈 2025. 10. 31.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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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 허윤희 개인전 ‘가득찬 빔’
11월 4일~2026년 2월 22일, 대구미술관 2·3전시실·선큰가든
240여 점 공개… 개막일 ‘물의 평화’ 드로잉 퍼포먼스
‘해돋이 일기’ 작업 중인 작가. (작가 SNS)


새벽의 바다는 날마다 색이 달라집니다.
그 빛을 수없이 그렸고, 다시 지웠습니다.

제주 서귀포 대포 앞바다에서 이어온 이 반복은 기록이 아니라 수행이었습니다.

그리기와 지우기가 남긴 결이 쌓이며 하나의 시간, 하나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25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인 허윤희 작가는 11월 4일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 ‘가득찬 빔(Beams of Emptiness)’을 엽니다.

회화·드로잉·조각·영상 등 240여 점이 30년의 예술 여정을 증언합니다.

‘해돋이 일기’ 전시 설치 장면.


■ 비움이 충만으로 바뀌는 순간

전시 제목은 작가가 직접 쓴 시에서 비롯됐습니다.
채움과 비움,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압축한 문장은 허윤희의 예술 세계를 함축합니다.

주요 매체는 목탄입니다.
나무를 태운 재로 그리고, 손끝으로 닦아내며 흔적을 남깁니다.

검은 층이 걷힌 자리에는 공백이 아니라 존재의 잔광이 남습니다.

작가는 결과보다 과정, 완성보다 지속을 택했습니다.

그의 회화는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 시간을 견딘 행위의 기록입니다.

허윤희 作 ‘해돋이 일기 Nr.119’ (2024, Oil paint on canvas, 46×61cm. 대구미술관 제공)


■ 제주, 존재가 다시 시작된 자리

2019년 제주로 이주를 모색하기 시작한 그는, 이후 여러 차례 한 달 살이와 작업 체류를 거쳐 2022년 완전히 제주로 정착했습니다.

새벽마다 바다 앞에 서는 생활은 그 무렵부터 이어졌습니다.

제주는 허윤희에게 풍경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깨어나는 장소’였습니다.
파도와 바람, 빛의 리듬 속에서 사라짐과 지속의 감각을 동시에 체험했습니다.

그때의 반복이 ‘해돋이 일기’로 이어졌습니다. 260여 점의 연작 중 146점을 이번 전시에 공개합니다.

하루의 빛을 담되, 그 빛이 사라지는 시간까지 함께 기록한 작업입니다.

색보다 시간이, 형태보다 호흡이 남습니다.

제주 대포 바닷가, 새벽의 빛을 그리는 작가. (작가 SNS)


2019년 제주에서 허윤희의 2인전 ‘공명하다’를 기획했던 안혜경 아트스페이스·씨 대표는 이번 수상을 “자연스러운 귀결”로 받아들였습니다.

안 대표는 “제주로 이주해 삶과 예술을 함께 쌓아온 작가의 궤적이 드디어 결실로 이어졌다”며, “강요배 이후 4년 만에 제주 작가가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 회화가 다시 자연과 시간의 언어로 회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로잉 퍼포먼스. (작가 홈페이지)


■ 물의 평화, 지워짐으로 완성되는 벽

전시의 정점은 개막일 11월 4일 오후 2시, 선큰가든에서 펼쳐지는 드로잉 퍼포먼스 ‘물의 평화’입니다.

허윤희 작가는 흰 벽을 목탄으로 채우고, 다시 그 어둠을 지워냅니다.
그 순간 벽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숨을 쉽니다.

이 벽화는 전시 종료일에 완전히 지워질 예정입니다.
지워지는 과정은 소멸이 아니라 회복의 행위입니다.

사라짐 속에서 세계는 다시 채워지고, 어둠은 빛으로 변환됩니다.
그 행위는 회화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허윤희 作 ‘관집’, Wood, stone, sand, cement, 200×130×260cm, 2025. 대구미술관 제공


■ 생태적 실존의 미학

허윤희의 회화는 철학자 팀 모튼(Timothy Morton)의 ‘다크 에콜로지(Dark Ecology)’ 개념과 공명합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을 벗어나, 존재와 자연이 얽힌 관계망 속에서 생의 윤리를 탐구합니다.

그의 화면은 상실과 지속, 기억과 회복이 교차하는 공간입니다.

전시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됩니다.
‘존재의 증명–실존의 시작’, ‘몸과 시간의 흔적’, ‘생태적 실존–사라짐과 치유’.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생성과 소멸의 감각이 하나의 서사로 이어집니다.

이 회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하는 시간입니다.

허윤희 作 ‘개가시나무는 살아있다 2’ (2025, Acrylic and charcoal on paper, 214×150cm. 대구미술관 제공)


■ 빛을 잇는 상, 수행으로 갱신되다

이인성미술상은 한국 근대 회화의 거장 이인성(1912~1950)의 예술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9년 제정됐습니다.

전통의 서정과 색채를 동시대의 언어로 이어가는 작가에게 수여되며, 대구미술관이 2014년부터 운영합니다.

심사위원단은 “현재의 성숙과 향후 확장 가능성”을 이유로 허윤희를 만장일치로 선정했습니다.

허윤희의 회화는 철학이자 수행이며, 동시에 감각의 언어입니다.

15살에 화가를 결심한 그는 지금도 새벽마다 바다 앞에 서서 빛을 기다립니다.

“성실한 작가로 남고 싶다.”
짧은 문장은 다짐이자 이미 완성된 태도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독일 브레멘예술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허윤희의 예술은 결과를 남기지 않습니다.
대신, 사라진 자리의 온도를 남깁니다.

그 온기가 다시 빛으로 피어나는 곳,
이번 겨울 대구미술관에서 그 장면이 펼쳐집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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