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 홧병 식히라고 만들었어요”...삭막한 도심 오피스 곳곳에 쉼표 찍혔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5. 10. 3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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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에 미술품 거는 기업들
광화문 KT 사옥 로비·통로에
박서보 ‘묘법’ 하종현 ‘접합’
韓 단색화 거장 대표작 전시
강남 포스코센터 야외 정원엔
제철소 쇳덩이로 만든 조형물
백남준 비디오아트도 로비에
서울 광화문 KT 사옥에 전시된 하종현의 대표작 ‘접합(Conjunction)-88’(1988). KT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서울 광화문 KT 웨스트사옥 2층 로비를 찾으니 점심 식사를 마친 직원들이 소파에 삼삼오오 앉아 한쪽 벽면에 걸린 박서보의 ‘묘법(Ecriture) No.101-87’(1987)을 감상하고 있었다. 등을 돌리면 광화문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작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하철 광화문역과 연결된 KT 사옥 지하 1층 통로에도 방문객 몇몇이 작품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하종현의 ‘접합(Conjunction)-88’(1988) 앞에서다. 마대천 위에 거칠게 밀려 올라온 물감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나 지하 식당가를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국내 단색화의 정수로 꼽히는 작품답게 두 작품 모두 직원과 방문객에게 인기가 높았다.

서울 광화문 KT 사옥에 걸린 박서보의 ‘묘법(Ecriture) No.101-87’(1987). KT
KT 관계자는 “두 작품 모두 1986년 광화문 사옥을 새로 준공한 지 얼마 안 돼 회사가 구입한 것”이라며 “그동안 15층 강당에 있어 임직원만 볼 수 있었는데 리모델링 후 더 많은 분이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 공간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고객과 투자자, 협력사 관계자 등 외부인도 예술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 셈이다.
서울 용산 삼일회계법인 본사에 전시된 김창열의 2008년작 ‘회귀(Recurrence) PBL08007’. 삼일회계법인
사옥에 미술 작품을 전시한 기업은 KT만이 아니다.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사옥에 입주한 삼일회계법인 17층에는 김창열의 2008년작 ‘회귀(Recurrence) PBL08007’이 걸려 있다. 다홍색으로 채워진 캔버스에 천자문이 가득 적혀 있고 그 위에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다. 이 작품을 소장한 한 임직원이 더 많은 이와 함께 감상하고 싶다는 뜻으로 회사에 전시를 제안했다. 17층은 고객 미팅과 회의가 이뤄지는 주요 소통 공간이다.

회사는 직접 소장한 이광호 작가의 ‘선인장 시리즈’와 라이언 모슬리, 제롬 부트랭, 폴 베르지에 등 유럽 작가들의 회화도 곳곳에 배치했다. 단조로울 수 있는 사무실에 색채를 더해 긴장감을 완화한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건물 구조가 크고 여유로워 대형 작품을 걸기 좋다”며 “근무 공간 사이사이 휴식 공간에도 작은 판화와 소품을 배치해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예술을 접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야외 정원에 설치된 프랭크 스텔라의 ‘꽃이 피는 구조물’(1997). 포스코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에는 별도로 포스코미술관이 있지만, 미술관에 가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건물 앞 야외 정원에는 미국 추상 조각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의 대형 금속 작품 ‘꽃이 피는 구조물(Flowering Structure)’이 눈에 띈다. 용접된 철 구조물은 빛에 따라 반사되는 색이 달라지며 거대한 꽃처럼 피어나는 형상을 이룬다. 한국 조각가 정현의 ‘무제 2014’도 자리해 있다. 바위처럼 놓여 있는 거대한 쇳덩어리는 포항제철소 야적장에서 가져온 파쇄공(쇠를 부수는 데 사용되는 도구)을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으로, 거칠게 닳고 파인 흔적을 통해 역경을 겪어온 인간의 삶을 연상시킨다.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서관 2층에 설치된 이우환의 ‘관계항’(1995). 포스코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1층 로비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작업 ‘철이철철: TV깔대기, TV나무’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아트리움 상부 설치물과 바닥의 구조물을 연결시켜 공간 전체와 어우러진다. 서관 2층에는 이우환의 ‘관계항’이 놓여 있다. 바위 한 덩이와 두 장의 철판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돌과 나’ ‘쇠와 나’ ‘돌과 쇠’의 관계항을 사유하게 한다. 포스코 관계자는 “회사는 누구나 예술을 가까이에서 즐기고 쉬어 갈 수 있는 열린 문화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울 여의도 파크원 로비에 전시된 김종학의 ‘설악여름 일월도’. 정유정 기자
서울 여의도 파크원 로비 역시 기업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LG에너지솔루션이 입주한 타워1 로비에는 김종학의 ‘설악여름 일월도’가 걸려 있다. 에너지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화려한 색채와 자유로운 붓놀림이 방문객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유리공예 작가 박선영의 ‘천상의 꽃’도 걸려 있다. 도자기처럼 보이는 유리 혼합 재료의 꽃이 배열돼 공간에 온기를 더한다. NH투자증권 등이 입주한 파크원 타워2에는 노상균의 ‘더블 엔드’와 ‘별자리-처녀자리’가 전시돼 있다.

이처럼 기업이 사옥을 갤러리처럼 꾸미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고객, 투자자, 협력사 등 외부인이 자주 방문하는 공간을 예술품으로 채우며 기업 이미지를 높이고 동시에 직원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창의적 자극을 주려는 의도다.

1988년 12월 문화예술진흥법 시행령 개정으로 연면적 1만㎡ 이상인 신·증축 건축물(업무·판매·숙박시설 등 일정 용도)은 건축 비용의 일정 비율만큼을 미술 작품 설치에 사용해야 한다. 작품을 구매하는 대신 문화예술진흥기금에 기금을 출연할 수도 있지만 많은 기업이 작품 구입을 선택하고 있다. 기업이 로비, 회의실 등에 사내 소장품을 전시하는 것은 단순히 내부 장식이 아니라 기업의 정체성을 문화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객과 투자자가 머무는 짧은 순간에도 예술로 채워진 공간을 통해 기업 브랜드를 세련되게 구축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미술품은 투자 자산으로서 가치도 주목받는다. 블루칩 작가의 작품은 안정적인 시세 상승을 보이며 인플레이션기에도 자산 가치를 지키는 효과가 있다. JP모건체이스의 기업 미술 컬렉션은 1959년 50만달러(약 7억2000만원) 규모의 투자로 시작됐는데, 현재 그 가치는 1억달러(약 1432억9000만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또 미술품은 주식이나 부동산보다 경기 변동에 덜 민감해 장기 보유 자산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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