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막부 몰락의 화근이 된 불평등 조약 체결 [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2025. 10. 31.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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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미국을 망문한 읿본측 대표단 [출처 : 야후재팬 화상]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으로 동맹국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각국은 맞대응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자칫 트럼프가 내민 손을 합부로 덥석 잡았다가는 국가경제가 벼랑 끝에 내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권의 위기마저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압박 수법은 170여 년 전에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 페리 제독이 일본 도쿄만에 함선을 몰고 와서 위력 시위를 벌이며 도쿠가와막부에게 개국을 요구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도쿠가와막부, 쇄국에서 개국으로 문호 개방

“지금 청국 텐진에 정박 중인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조약을 맺고 나면 곧바로 일본으로 출항할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 서둘러 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일본 열도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점령당할 것이다” 미국의 초대 일본총영사 타운젠드 해리스는 1858년 7월 일본 측 협상 대표인 이노우에 기요나오와 이와세 다다나리에게 목하 진행 중인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열강과 청국 간의 전쟁(제2차 아편전쟁, 1856~1860년)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전쟁이 끝나면 양국이 일본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수교를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보다 앞선 1853년에는 돌연 도쿄만에 함선을 이끌고 출현하여 일본을 놀라게 한 미국 동인도함대 소속 페리 제독은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에게 개국할 것을 요구했다.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캘리포니아를 획득함에 따라 태평양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미국은 통상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와 청을 연결하는 태평양 항로의 중간 기착지와 포경선 피난처 확보 차원에서 일본의 개국을 압박했다. 미국의 의중을 전달하고 돌아간 페리는 이듬해에 다시 찾아와 일본과 영사관 설치 등을 규정한 미일화친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1856년에는 해리스가 양국 간 수교를 규정하는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임무를 띠고 미국 초대 영사로 부임했다.

미국이 일본과의 조약을 서두르게 된 이유는, 아편전쟁 이후에 체결한 난징조약으로 청에 대한 권익을 확보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이 다음 먹잇감으로 겨냥한 곳이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을 둘러싼 서구 열강의 관심이 뜨거워진 시기에 미국이 한발 앞서 일본에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이미 청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침탈 사태(아편전쟁)를 파악하고 있던 막부 관료 대다수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일본을 침공하기 전에 하루빨리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미국과의 수교가 서구 열강의 침략을 저지하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수교에 가장 적극적으로 앞장선 인물이 각료 마쓰다이라 다다가타였다. 그는 “교역은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일본의 앞날은 교역에 의해서 융성해 나가야 한다”라며 개국과 통상을 주장했다. 막부의 개국론자들을 리드하는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고메이 천황을 중심으로 해 존왕양이를 부르짖는 개국 반대파의 거센 반발을 물리치고 수교 협상을 밀어부쳤다.

막부와 미국 양측은 15차례에 걸친 교섭 끝에 1858년 7월 29일 가나가와현의 우라가 앞바다에 정박 중인 미국 전함 포와탄호 선상에서 총14개 조항과 부칙, 무역장정으로 구성된 미일수호통상조약에 서명했다. 주요 조항으로는 제2조 ‘일본과 유럽 국가 간에 문제가 발생할 시에는 미국 대통령이 이를 중재한다’(중재 조항). 제3조 가나가와, 나가사키, 니가타, 효고 개항. 제6조 영사재판 관할권. 11조 부칙 무역장정(관세율 규정 등)이다. 막부는 이어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와도 조약을 체결하며 쇄국에서 개국으로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하는데 이를 ‘안세이 5개국조약’이라고 부른다.

일본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타운젠드 해리스 미국 초대 일본총영사 [출처 : 야후재팬 화상]

불평등 조항, 영사재판권 인정과 관세 자주권 상실

그런데 이들 조약 가운데 일본 측에 불리한 독소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상대국에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여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을 일본이 처벌하지 못하게 되었고(영사재판권 인정), 관세율 적용을 상대국과 협의하도록 규정했다(관세 자주권 상실). 관세율에 관해서는 1866년에 추가로 개정된 협약에 따라 세율이 5%로 하향 조정되었다. 이로써 값싼 외국상품이 일본 시장에 대거 유입되어 무역 불균형을 심화시켰다. 수입품은 낮은 관세로 일본에 들어오고 일본 제품의 수출은 개항장에 거주하는 외국상인들의 손에 좌우되는 구조였다. 불평등조약이 체결된 결과, 금의 해외 유출과 인플레이션 유발로 인해 일본경제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 반대에 앞장선 고메이 천황 [출처 : 야후재팬 화상]

밀어붙이기식 조약 체결이 막부의 몰락을 재촉

이와 같은 이유로 조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분출하는데 그 중심에 고메이 천황이 있었다. 그는 조약을 체결하려면 천황의 최종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막부가 이를 어기고 일방적으로 조약 체결을 추진했다며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천명했다. 여기에 존왕양이 사상의 발상지로서 이 세력의 총본산인 미토번(현 이바라기현 미토시)에 활동가들이 결집하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 등이 천황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반대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미토번 무사가 해리스 총영사 암살을 시도하려는 음모가 발각되는 등 혼란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그러자 막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쇼군을 보좌하는 막부 최고 관직인 ‘다이로(大老)’에 이이 나오스케를 임명하는데 그는 천황의 측근과 존왕양이파 다이묘 그리고 활동가들을 대거 체포하여 처형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安政の大獄). 이에 반발한 미토번 출신의 무사가 나오스케를 암살하면서 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는다(桜田門外の変).

막부의 정국 주도권이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고메이 천황의 권위가 높아지며 입지가 더욱 굳어지게 되자 정치의 중심지가 막부의 에도(현 도쿄)에서 천황의 교토로 바뀌었다. 천황의 거처가 있는 교토에는 천황의 측근 신하를 포함하여 조슈번, 사쓰마번 등 지방의 유력 다이묘와 무사들이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세우고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 천황 측 인물로는 산조 사네토미와 이와쿠라 도모미, 사쓰마번의 오쿠보 도시미치, 조슈번의 이토 히로부미와 기도 다카요시 등 도쿠가와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유신 정부가 들어설 때 중심 역할을 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급진 성향의 무사들에 의해 테러가 자행되고 천황조차도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 일까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막부 타도를 위한 깃발 아래 모여들어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손을 잡고 ‘삿초동맹’을 맺음으로써 260여년의 무사정권인 도쿠가와막부 정권을 무너트리고 천황 중심의 메이지유신 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항을 하게 된다.

도쿠가와막부가 외세의 압력에 떠밀려서 서구 열강과 맺은 밀어붙이기식 조약 체결은 민심 이반을 초래하고 반대 세력의 입지만 강화시켰다. 이는 결국 막부 몰락의 화근이 되었다. 이 점에서 트럼프식 세계 질서에 순응하고 굴종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도쿠가와막부 몰락의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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