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숙의 시니어하우스 일기] [6] 낡은 노트북에 쓴 글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윤명숙 작가·화가 2025. 10. 3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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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년 넘게 컴퓨터와 씨름한 ‘컴맹’
아들이 사준 신형 대신 구형 쓰다 맙소사
머리 쥐어짜 쓴 글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체면 때문에 아들에겐 물어보지도 못하고
관리소·AS 센터 등 돌아다녀도 해답 없어
‘운명을 달리했구나’ 새 노트북을 펼쳤다
/일러스트=양진경

몇 날 며칠, 머리를 쥐어짜 쓴 글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내 머릿속도 순간 멈춰버린 듯했다.

나는 컴맹이다. 그럼에도 20년 넘게 컴퓨터와 씨름한다. 내 노트북은 아주 오래된 구닥다리라서 걸핏하면 말썽을 부리고 그럴 때마다 노트북을 사 바친 아들을 불러낸다. 올해 환갑을 맞은 아들은 번번이 낡아빠진 노트북을 들여다보기가 짜증 났는지, 브랜드가 다른 새 노트북을 사주면서 사용법을 꼼꼼히 일러 주었다. 들을 땐 다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아들이 간 뒤에 막상 혼자 해 보려고 하니 기억이 가물가물. ‘아뿔싸! 녹음할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아들을 다시 호출하려니 염치가 없어 그날부로 새 노트북은 책장 밑 서랍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새로운 것에 거부감이 심하다. 새 옷을 사도 장롱에 몇 달 걸어놓고 눈에 익은 후에야 꺼내 입는 화상이다. 그러니 노트북이라고 예외일 리 있나. 한사코 낡은 노트북을 끼고 돌다가 결국 사고를 불렀다. 글이 통째 사라지다니... 한두 줄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일은 전에도 몇 번 있었으니, 희망을 품고 이것저것 열심히 눌러 봤다. 하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짧은 글이긴 하나 마감이 가까운 원고라서 엉덩이에 쥐가 날 때까지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 간신히 골인 지점에 다다라, 드디어 마지막 한 줄을 쓰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화면의 글이 몽땅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또 기이하게도 마지막 문장은 남겨놓았다.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하필 왜 이 문장만 남았을까? 진작에 얼른 잘 쓰지 왜 막판에 서두르냐고 핀잔을 주듯 그 문장이 나를 노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30년 전 컴퓨터 학원에 다니다 도중 하차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젊은이들 틈에 끼어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고작 한 달 남짓 강의를 듣고 그만두었다. 겨우 문서 창 여닫고 쓰고 지우는 정도를 배우고는 목적 달성했다고 만족한 것이다. 지금도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내가 쉽게 흘려보낸 젊음을 이토록 아쉬워할 날이 있을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당장 아들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새 노트북의 행방을 이실직고해야 하니 아무리 다급해도 체면이란 게 있지 않겠나? 그래서 전화는 접고 내가 직접 나서 보기로 했다. 말 안 듣는 노트북이 그래도 한 줄 작은 단서라도 흘렸으니 전체를 되살릴 방법이 있지 않겠나. 나는 노트북을 들고 1층 관리 사무실로 내달렸다. 이미 여러 번 그의 도움을 받은 터라 젊은 직원이 숨을 헐떡이는 나를 보고 무슨 일로 왔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우린 소파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두서없이 주절대는 내 얘기를 듣더니 젊은이가 프로처럼 모니터를 살피며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다소곳이 앉은 나는 젊은이와 노트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색없이 충천하던 기세가 차츰 꺾이면서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이 두근댔다. 직원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나서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나는 수고했다는 말도 하는 둥 마는 둥 집으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다시 조심스레 열고 빈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머릿속이 텅 비었는지 날아간 글이 한 줄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 날 일찌감치 샤워장에 내려가, 그놈의 사라진 글을 떠올려 보려고 찬물을 뒤집어써 보았다. 효과는커녕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라는 마지막 문장만 집요하게 뒤통수에 달라붙어 나를 괴롭혔다. 이럴 바에야 한 번 더 사라진 글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시니어 하우스에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00전자 숍이 있다. 지난번에도 고장 났을 때 찾아갔던 곳이다. 삼복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카오맵을 따라 출발했다. 초행도 아니고 손에 길잡이까지 들고 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길을 잃었다.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걸은 탓에 2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1시간을 헤매 돌아다녔다. 간신히 3층 AS 부서로 찾아가 접수증을 뽑고 그제야 어깨에 무겁게 매달려 있는 가방 속, 내 운명이 다한 가여운 노트북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대기자들이 많지 않았다. 땀도 식기 전에 내 차례가 왔다.

직원은 내가 건네준 노트북을 열고 나를 건너다보았다. 내 말을 기다리는 눈친데 상황을 설명할 능력이 없으니 나는 쓴 글이 홀랑 사라졌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나이 지긋한 직원이 내게 눈길을 거두고 말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댔다. 한동안 그렇게 탐색하던 직원이 허리를 쭉 늘이며 내게 말했다. 못 찾겠단다. 잔뜩 기대했던 나는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주섬주섬 짐을 가방에 쑤셔 넣고 직원한테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깍듯이 하고 건물을 나섰다. 생각보다는 화가 덜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헤매지 않았다.

그날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깜박 이성을 잃은 내 입이 방죽 터지듯이 말을 쏟아냈다. 사라진 글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입방정을 떤 지 1시간도 안 되어 딸이 들이닥쳤다. 내 시한부 노트북은 또 한 번 딸의 손에 맡겨져 녹초가 되었다. 그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당장 제 오라비에게 전화로 그간 사정을 고해바치는 바람에, 다 늙은 내 노트북은 원래 주인인 아들네로 원정을 떠났다. 다음 날, 아들이 전화했다.

“엄마! 이거 안 돼. 도로 보낼게.”

“보내지 마! 네가 알아서 처리해.” 황급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등에서 오랜 짐을 내려놓은 듯 가뿐해졌다. 나는 ‘서둘러’ 새 노트북을 펼쳤다. 이제 새로운 노트북으로 마음을 옮길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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