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동 화재 참사 26주기-잃어버린 명예, 그 후] (하) 참사 다음의 권리
인천·서울서 '기억과 애도의 상영회'
이태원 참사 유족과 대화…기억 되짚어
“우리만 싸우는 게 아니라는 위로받아”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 1심 패소
유족, 납득 불가…권리 회복 위해 항소
사고 후 유언비어·2차 가해…고통 지속
지혜 학생 '종업원' 여부 가를 증빙 못해
중구 “정보 부존재”…26년째 보상 보류
최근 '재난 피해자 인권 조례안' 통과
기존 보상 조례, 종업원 배제 논란 여전
유족 측, 지속적 개정 촉구했지만 묵살
'보상금 청구 소송' 항소심 첫 변론 돌입

지난 줄거리
인현동 화재 참사 현장에서 숨진 지혜를 둘러싼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에 나섰던 유가족들은 1심 패소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근거도 없이 아르바이트생으로 분류되고, '가해자'로 낙인찍힌 지혜 사연을 놓고 대통령실 사회적 참사 간담회에서도 "왜?"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지혜 엄마' 김영순이 제기한 소송에서 피고 인천시와 중구 측은 "보상이 종결됐다"고 주장했다. 중구 보상심의위원회는 2000년 초 "방화 가담 여부 및 종업원 여부"에 관한 확인을 이유로 '보류' 판단을 내렸고, 더 이상 재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가족들은 중구 보상 조례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공론화에 나섰다.


"사고를 당한 학생 중에 지금까지도 명예 회복이 안 된 아이가 있어요. 법원 문을 두드려봤는데 1심에서 패소를 했어요. 이지혜 학생 명예 회복이라도 시켜주려고 우리끼리 싸우고 있어요."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인디스페이스 영화관에서 진행된 '기억과 애도의 상영회'. 인현동 화재 참사 26주기, 그리고 이태원 참사 3주기를 앞두고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이 상영됐다.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춘효 아빠' 김폰삼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나란히 앉았다.
"관중석에는 앉아 봤어도 앞은 처음이라 떨려요. 26년 동안 외롭게 싸우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만이 아니고 또 힘들게 싸우고 계시는 분들이 있구나 하는, 그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전 인천 미추홀구 영화공간 주안에서도 같은 영화로 '기억과 애도의 상영회'가 열렸다. 유형우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부위원장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고, 책임자들에 대한 재판도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대화의 시간에 참여했던 이재원 유가족협의회장은 3년 전 기억을 되짚었다. 2022년 10월29일 이태원 참사를 알리는 뉴스 속보가 전해졌다. 재원과 폰삼, 두 사람은 그날 밤 인현동 화재 참사 추모제에 있었다.

▲"이런 기록들도 2차 가해 아닙니까?"
"가슴에 맺힌 말들이 있어요.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당시 보고서에서 확인한 거예요. 유가족이 몇억원을 요구할 예정이다, 일반 시민한테 모금 운동을 하면 호응도가 낮을 것으로 예상되니 학생들을 동원한다는 문구가 나옵니다. 이런 기록들도 2차 가해 아닙니까?"
인천시의회 의원연구단체 '인천형 시민정책 연구회'가 지난 8월19일 주최한 간담회에서 재원은 인천시 공무원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책 간담회 주제는 '재난 피해자 인권 보장 조례 제정'이었다. 연구회 대표를 맡은 김대영 인천시의원은 조례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초안에는 '2차 피해 방지' 조항이 포함됐다.
인현동과 이태원의 공통점은 불완전한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만이 아니었다. 피해자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하는 행위, 2차 가해는 유가족들에게 참사 이후의 참사로 다가왔다. 따지고 보면 인현동 화재 참사가 출발점이었다.
"사고 희생자에 대한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세력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음해를 즉각 중단하라."⑴
인현동 화재 참사 50일째였던 1999년 12월18일 동인천역 광장에선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인천시민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유가족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일차적 책임이 있는 인천시는 지금까지의 직무 유기를 참회하고 사고 수습을 위해 유가족과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근거 없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유포시켜 희생자들을 욕되게 하는 검은 세력들도 이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결의문을 낭독했다.
인현동 화재 참사 직후, 애도 대신 매도가 그 자리를 메웠다. 희생자와 부상자, 유가족들이 겪은 2차 피해는 인현동에서 이태원으로 연결됐다. 지난해 5월 제정된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 보장과 진상 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은 "차별받지 아니하고 혐오로부터 보호받으며 필요한 조력을 받을 권리"를 재난 피해자 권리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유언비어"와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렸던 인현동 화재 참사로부터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잘못한 사람은 불법 영업을 했던 점주, 그것을 눈감아주고 뒷돈 받아 챙겼던 공무원과 경찰 같은 어른들인데 우리 아이들을 불량스러운 학생으로 몰아갔으니까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지혜 엄마' 영순은 지난 8월7일 인천시청 앞 기자회견에서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말문을 이었다. '현민 아빠' 재원이 그랬던 것처럼 "가슴에 맺힌 말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종업원' 분류, 증빙 서류는 '부존재'
지혜는 중구 보상심의위원회 의결 과정에서 '종업원'으로 분류됐다. 인현동 화재 참사로부터 110일이 지난 2000년 2월16일이었다. 보상심의위원회는 "추후 방화 가담 여부 및 종업원 여부에 관한 법적 증빙 서류 확보 후 보상금 지급 여부를 결정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방화 가담 여부는 해당되지 않았다.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한 원인은 "노래방 종업원들의 실화"⑵로 밝혀졌다. 노래방은 지하에 있었다. 인현동 화재 참사 희생자 57명 가운데 지혜를 포함한 56명은 유독가스가 유입된 2층에서 발견됐다.
"화재 발생 및 피해 확대 원인, 불법 영업을 비호한 배후 세력 및 관련 공무원들의 뇌물 수수 등 유착 사실에 대한 진상 규명에 진력하였음."⑶
검찰은 보상심의위원회가 열리기 두 달여 전인 1999년 12월1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구속 21명을 포함해 피의자 34명을 형사 재판으로 넘겼다. '정민하'라는 가명을 쓰던 업주에 더해 화재 관련 피의자 명단에는 종업원 3명이 포함됐다. 실화자와 건물 관리인, 그리고 "돈 내고 가라"며 대피를 막은 관리 사장이었다. 화재 발생과 피해 확대 원인에 대한 수사에서 참사 당시 숨진 지하 노래방 종업원을 제외하면 방화 가담자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았다.
종업원 여부를 가를 증빙 서류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지혜 문제 해결에 나선 재원은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을 앞두고 중구에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그날 지혜가 아르바이트생으로 그곳에 있었는지가 법적으로 증빙되려면 부모 동의서, 근로계약서, 출근부 등과 같은 서류가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중구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정보 부존재"였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법적 증빙 서류는 26년간 보상 심의를 '보류' 상태로 만든 족쇄나 다름없었다.

▲너무 늦게 찾아온 재난 피해자 인권
"재석 의원 29명 중 찬성 29명, 반대·기권 0명으로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
'인천시 재난 피해자 인권 보장 조례' 제정안은 지난 23일 인천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재난 피해자 인권에는 "재난 상황·대응·복구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권리"와 "배상 및 보상을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됐다. 존재하지 않은 정보로 인해 희생자 보상 범위에서도 배제된 지혜에게 재난 피해자 인권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인천시 중구 인현동 화재 사고 관련 보상 조례'는 합리적 이유 없이 사상자 중 종업원을 차별해 보상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헌법에서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합니다."⑷
영순은 지난여름 보상 조례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천시 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종업원'이라고 간주되더라도 보상 범위에서 원천적으로 배제한 행정은 인권 침해 소지가 있었다. 인천시 인권보호관을 지낸 이준형 변호사는 진정서에 "종업원을 실화자·가해자와 동일하게 취급해 보상에서 제외하는 건 불합리한 차별"이라며 "화재 사고로 인한 사상자 중 종업원은 오히려 더 취약한 지위에 있는 경우가 많으며, 사고 발생 시 대피할 기회가 부족할 수 있다"고 썼다.
계절이 바뀌도록 보상 조례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단 한 줄의 조례 문구를 고치는 것마저 지난한 싸움이 될 줄은 유가족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공존한 그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시청과 중구청에는 "이태원 참사 기억하고 함께하겠습니다"라고 쓰인 현수막이 펼쳐졌다. 인현동 화재 참사를 추모하는 현수막은 위령비가 세워진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골목에만 걸렸다.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기억·추모·애도를 받거나 할 권리"를 보장한다.
"참사를 기억하려는 뜻은 깊이 새깁니다. 그런데 인현동 화재 참사는 현수막을 내걸기가 부끄럽습니까? 잊어버리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습니까?"
스물여섯 번째 10월30일 오후 3시,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주차장 구석 위령비 앞에서 재원은 회고사를 읽어 내려갔다. 같은 시각, 법원에선 지혜의 '재해 사망 보상금 청구' 소송 항소심이 첫 번째 변론에 들어갔다. 법정 투쟁도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글·사진 이순민·이창욱 기자 smlee@incheonilbo.com
참고자료
⑴'인현동 화재 참사 희생자를 위한 인천시민 합동 추모제' 참가자 결의문, 1999년 12월18일.
⑵행정자치부, '인천 화재사고 관련 후속 안전대책 검토', 1999년 11월11일.
⑶인천지방검찰청,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 종합수사결과', 1999년 12월1일.
⑷인현동 화재 참사 유가족협의회, '인천시 인권위원회 진정서', 2025년 8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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