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청년문학상 소설부문 본상 당선작] ‘난장이의 목장’

4번 말, 원더블레이드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흑갈색의 말은 건강하고 윤기가 넘쳤다. 사지 멀쩡한 말은 흘러나오는 힘을 주체하지 못했다. 김세영은 연신 말의 목을 달래듯 애무하며 두드렸다. 내 말이 말을 듣지 않는다. 채찍을 휘둘러야 반응이 올 것 같지만 옆 말이 맞을까, 발주 위원이 싫어해 발을 등자에서 빼고 길게 내리고는 뒷꿈치로 말의 배를 툭툭 쳐 주었다.
"레디. 탕."
"출발했습니다. 코리아컵 레이스가 시작됩니다."
발주대 문이 열리고 말들이 질주한다. 김세영은 원더블레이드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렇지. 출발이 같아서는 안 된다. 출발점이 다르다. 나는 안장 고정대를 잡고 나오면서 말을 모는데, 출발하면서 고정대에 무리하게 힘을 주어 안장 고정대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은 균형이다.
"라온이 빠른 출발을 보였고요. 뒤를 이어 비스틀리와 이제 라치가 선두권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등자를 짧게 밟고 엉덩이를 높이 들어 몸의 균형을 맞췄다. 바람의 저항을 덜 받고 말잔등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다. 말의 편자가 땅에 닿을 때마다 내 몸이 붕 뜸을 느낀다. 웅크린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나는 하체에 힘을 주었다. 눈 앞에는 곡선 주로와 그 위로 가속도가 붙은 라온이 있다. 채찍질은 금물이다. 상체가 들리거나 뒤로 쳐짐으로써 중심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균형을 맞춰야 한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타이밍을 노리는 기수들이 있을 텐데요. 론 셀러는 안쪽에서 가장 뒤쪽이고요."
공격성은 인간의 재능이다. 먹잇감을 놓고 경쟁하려면 종들 사이보다는 동일종 내에서 공격적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다시 눈 앞에 펼쳐진 직선 주로. 뒤따라 오는 말들의 발굽소리가 거슬린다. 라치가 앞서기 시작했다. 라온, 라치. 부모가 잘나 대접받는 서러브렛들이다. 그래서 때로는 기력이 없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히면 올라가지 못할 바에 차라리 끄집어 내리기라도 하면 직성이 풀린다. 타협을 하면 무엇인가를 잃고 무엇인가를 얻는다. 그 무엇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잃는 무엇인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얻는 무엇인가는 가시적이다.
"라치. 승부수를 띄우네요. 최세문 기수의 자신감이 보이는 데요. 론 셀러와 원더블레이드가 지금 같은 선상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둘이 이미 4위권, 5위권까지 치고 나온 바깥쪽 모습인데, 4코너 중반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코너를 돌고 직선 주로에 진입을 곧 앞두고 있습니다."
김세영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눈이 마주쳤는데 웃지 않는다. 대기실에서 모두 최기수의 1등을 축하하는데 김세영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 버린다. 나는 복도에 나가 담배 한 가치를 물었다. 밖으로는 마쟁이들이 경마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덩치가 큰 경호원들의 표정이 심각하다. 마쟁이들이 흥분하여 곳곳에서 육두문자가 들렸기 때문이다. 병신들. 먹이사슬 구조에서 피식자를 연구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고 한국마사회를 연구하라는 것은 아니다. 나도 윗분들이 뭐 경남의 조직폭력배, 사설경마업자와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하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생산자단체, 구단주인 마주, 감독인 조교사보다도 하위에 있는 기수에게 기대를 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최소의 마권으로 최고의 배당을 얻을 수 있는 분석 경마? 뭐, 언제 쇼가 열릴 지는 복불복이다. 그저 낙관하지 않는 희망을 가지길 바란다. 여기, 피식자 중에서도 1차 소비자를 충실히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 매우 성실한 사람이다.
"몸 컨디션 어때?"
박아저씨는 제주 조랑말 몇 마리를 키우다 98년 마필관리사로 입사해 경마와 첫 인연을 맺었다. 나와의 인연은 제주 조랑말 몇 마리를 목장에서 키울 때였다. 박아저씨의 목장은 아이들에게 큰 흥밋거리였다. 나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들을 따라 목장에 갔었다. 박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다른 아이들이 조랑말을 보며 웃을 때, 나는 웃지 않았다고 한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적갈색 조랑말에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그 조랑말의 이름은 '슈퍼캡틴'이었다.
"한 번 타볼래?"
박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슈퍼 캡틴의 등에 올라탔고 그것이 내가 기수로서 살게 된 첫 순간이었다.
손질을 받지 않아 슈퍼 캡틴의 갈기는 거칠고 길었는데, 그래서 그 때는 스타트를 할 때 한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한 손으로는 갈기를 잡고 나오곤 했었다.
"얘는 몇 살이에요?" "말은 치아로 나이를 알 수 있어. 얘는 수말이라 견치가 4개 더 있어 이빨이 40개야. 저기 봐. 저기가 이의 씹는 부위인데 동그랗게 원형 모양이지? 원래는 좀 길죽한 타원형이였는데..."
나는 말부터 말을 타는 법까지 박아저씨로부터 많은 것을 세심하게 배웠다. 하교를 한 후, 목장에서 나와 슈퍼 캡틴이 달리면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내가 커가면 커갈수록 구경꾼들의 환호는 줄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즈음 구경꾼들의 발길도 점차 끊겼다.
"라온이랑 라치가 1,2위했다며?"
"네. 라치가 곡선 주로에서 추입이 좋더라고요."
"역시 그 씨암말이 달라. 자마를 배출하는 것이 1년에 한 두 정도긴 하지만."
박아저씨는 역시 말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그런데 요즘 원더블레이드가 왜 그래. 원래 그 정도는 아니..."
박 아저씨는 김세영의 말 원더블레이드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내 눈치를 살짝 보더니 말수를 줄인다.
"좀 악벽마라 그런가..."
"그렇죠."
나는 옆에 있는 크림빵 껍질을 벗겨 한 입 베어 물었다.
"요즘 아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요?" 박아저씨는 한 달 후 있을 결혼식 전 아들이 집을 해 가야 한다며 허리가 휜다고 거듭 말했다. 예비 며느리는 조그만 상담 회사를 다니는 데다가 아버지는 곱추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역시 부모가 잘나야 한다. 그것은 말도 마찬가지다. 동물들 가운데서 말은 연좌제가 제일 심하게 적용된다. 부모의 혈통에 따라 값도 수억 원대를 넘나들고 핏줄에 따른 대우도 그렇다. 이런 세계에서 정말로 불쌍한 말이 있는데 시정마다. 시정마는 암말이 씨수말과 쉽게 교배에 응하도록 암말을 흥분시켜 주는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데, 암말의 엉덩이에 접근하다 보면 성질 더러운 암말한테는 뒷발로 차일 수도 있다.
"형제가 용감해."
이청용 조교사는 라온, 라치를 언급한다.
"애비가 다르니 이복 형제지. 니 년도 그러겠구나."
김 처장은 아가씨의 허벅지에 손을 끼워넣으며 말했다. 아가씨들은 꺄르르 웃는다.
"잘 하고 있어. 앞으로도 3위 유지하고, 다음 경기엔 딕시레인을 줄까 하는데 어때? 이번 비스틀리가 아무래도 발주가 좀 둔해서 조마조마했지?"
이 조교사는 고급 양주 한 잔을 따라주면서 말했다. 곧 조교사는 윗분의 전화가 왔는지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는다. 나는 아가씨들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다들 꽤 반반하다. 그 중 한 기집애랑 눈이 자꾸 마주친다. 미간이 넓어 어려 보이는 얼굴의 기집애는 중단발 컬의 머리카락 때문에 성숙해 보여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기집은 뻘줌했는지 물을 홀짝 들이마신다. 그 때 황마담이 들어왔다.
"청용씨가 계산했으니, 마음에 드는 아가씨 한 명 골라봐요."
황마담의 권유에 나는 처음에는 필요 없다며 조용히 한 두 번 거절하다, 김 처장의 귀에 들어갈까 조금 전 그 기집애랑 바깥에 나오게 되었다. 기집애는 룸 뒷골목에 있는 모텔촌 중 한 모텔로 익숙하듯 먼저 들어간다. 난 그 뒤를 따라 갔다. 기집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기집애는 선이 있었다. 물음에도 본명, 사는 곳, 폰 번호까지 입을 다물었다. 말실수로 자신이 낮에는 화장품 회사에 다닌다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말에 형편이 어려우니 하는 거라는 답변뿐이었다. 뭐, 나도 그렇다. 두 명의 남자는 저 편에서 이조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는 예시장에서 나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니, 나에게 걸어왔다. 한 남자는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나머지 한 명은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김 처장한테 들었죠? 오늘. 알죠?"
그리고는 왼손을 들었다. 왼손을 들면 이행, 오른손을 들면 불이행이라는 뜻이었다. 김세영 그 놈은 그런 걸 알려나 모르겠다. 어제 귓동냥으로 들어보니 2015년 조교사 면허를 따기 전 자비를 들여 일본, 호주, 영국 등에서 선진 경마를 배우고 최근엔 조교사 개업을 하려고 틈나는 대로 제주도를 돌면서 말 위탁 관리 의향서를 받으려고 마주들을 설득 중이라는데 줄을 잘못 서도 한참 잘못 섰다.
"저것 봐. 앞다리를 앞으로 뻗을 때는 머리를 위로 쳐들고, 뒷다리를 앞으로 깊숙이 집어넣을 때는 머리를 아래로 숙이지?" 이 조교사는 딕시레인의 머리 운동을 분석하며 비스틀리보다 긴 목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아 삶과 입이 좀 거칠긴 하지만, 내가 보기엔 프로 사령탑이다. 이제 막 데뷔한 견습 기수인 나를 베테랑 기수로 키우고, 전문 마필 관리사를 고용해 경주마의 훈련과 컨디션 체크, 다른 마방의 성적을 분석하는 일까지 모두 능숙하게 해낸다. 나는 속보로 두 바퀴 타주고 그 다음에 딕시 레인의 몸을 풀어 주기 위해 빠른 구보로 달려 주었다. 긴 목으로 머리 운동을 반복하며 몸 전체 중심의 위치를 전후로 이동시키는 딕시 레인의 힘이 느껴진다.
"저 말은 요즘 성적이 안 좋잖아요."
멀리서 김세영의 화난 목소리가 들린다. 김세영, 이 조교사와 실랑이중이다. 풋. 제라게라니. 어깨 상태가 안 좋은 말이다. 김세영은 목에 핏대가 서도록 이 조교사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듯하다. 참다 못한 이 조교사가 경마 예상지 잡지를 돌돌 말아 김세영의 머리를 때린다. 일본, 호주, 영국까지 유학을 다녀온 것 보면 집도 좀 사는 것 같은데... 소용 없다. 어쨌든, 김세영이 저토록 흥분한 것은 처음 본다. 주로에 말이 쏟아져 나온다. 주로는 좁고 말은 많아 훈련할 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방마된 말들과 충돌하면, 심한 경우 그 자리에서 죽는 경우도 있으며 기승자는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 이런 긴장도 풀 겸 기집애를 만나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집애와 섹스를 끝내면 사심 없이 달린 후 결승선을 1등으로 골인했을 때같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 립스틱은 무슨 색이야?"
"루비우요."
"루비우?" "립스틱엔 누드, 오렌지, 핑크, 레드 계열이 있는데, 레드 계열의 루비우요. 빨강색이 쨍하게 발색이 좋아요."
기집애는 비정규직 주제에 화장품 얘기가 나오자 영어를 섞어가며 가르치려 들었다. 그래도 귀엽다.
"그런데 너 몇 살이야? 이십대 같긴 한데..."
"음, 나이는 뭐 말해도 될 거 같다. 음. 스물 두 살이요."
기집애는 조금 생각을 하다 더듬거리더니 겨우 나이를 말한다. 룸 말고 따로 만나자는 제의에도 황마담과 계약한 것이 있다며 안 된다고 요지부동이다. 그러더니 걸려온 전화에 화장실로 가 전화를 받는다.
딕시레인의 뒷다리에 상처가 나 있다. 관리사는 어제 쿵쾅쿵쾅 소리가 나길래 가보니 말이 누워 자다가 사각으로 되어 있는 벽의 귀퉁이에 몰려 일어나지 못하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단다. 훈련할 때를 제외하고는 500kg 가까이 되는 거구가 3평 조금 모자라는 마방에서 사료나 먹으면서 가만히 있으려니 그럴 만도 하다. 나는 예전에 풀옵션 원룸에 살 때 뭐를 먹기만 하면 체를 했었다. 먹고 움직일 공간이 없으니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된 것이다. 일반 경주 12만원, 야간 경주 15만원, 특별 경주 50만원... 나를 월세 원룸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기승료나 협회비, 의료보험, 국민연금으로 다 떼어 가는 5%도 안 되는 상금이 아니었다. 나는 음습한 수분을 제거하려고 숯다발을 천장에 매달아 놓기 위해 옆 사다리를 꺼냈다.
기수 생활을 한 지도 벌써 8년이 되어 간다.
마방, 새벽 훈련, 시합, 마방, 새벽 훈련, 시합.
이것은 마치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를 이 세계에 던져놓고는,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의 틀에 가두어 두는 느낌이다. 이 기분이 불편한 이유는 내가 쥐새끼라는 것이다. 누구나 피식자임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동물들이야 상대를 죽이고 파멸시키지만,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먹잇감과 포식자의 관계는 흔히 짐작하는 것만큼 공격적이지 않다. 누군가 말했듯, 집단적 수준에서 포식자는 먹잇감을 결코 전멸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생존도 위협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인생을 정한 것이 이조교사도, 그렇다고 조교사 위의 윗분들도 아닌 윗분들보다 더 위에 있을 수도 있는 신이라는 것이 나를 이 정도 뇌 수준에, 이 정도 얼굴 수준, 이 정도 키 수준으로 만들어 던져 놓았다는 것이 가끔 분할 뿐이다. 쥐새끼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기력하게 실험용으로 이용되는 흰쥐나 모피로 이용되는 사향쥐가 되기보다는 들이나 산, 사막, 숲에 살며 음식물 도적질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었다. 요즘엔 쥐새끼마냥 기집애의 온 몸을 킁킁대며 탐닉하는 것이 황홀하다. 기집애는 160cm의 아담한 키에 가슴은 크고 다리가 길어 균형이 잡힌 몸매였다. 기집애의 살을 부여잡고 안에 정자를 뿌리고 싶지만, 기집애는 극도로 흥분을 한 와중에도 콘돔을 껴야 한다며 피임을 했다.
"그래. 그게 연승식인거지. 5두 이상 7두 이하면 1,2등을 승마로 결정하고 8두 이상이면 1,2,3,등을 승마로 결정하는 거고."
기집애는 요즘 경마에 관심을 가지는 중이다. 그리고 이해력이 빠른 편이었다. 단승식, 연승식, 복승식, 쌍승식, 복연승식 등 마권을 설명해주면 잘 알아들었다. 경마를 알려주면 알려줄수록 시큰둥한 것도 마음에 든다. 아, 어쨌든 거의 3주 만에 기집애의 이름도 알아냈다. 기집애의 이름은 박성애였다. 무엇보다 성애는 계산이 빨랐다. 룸에서 황마담에게 허락이라도 맡듯 만나는 게 싫어 따로 만나자는 말에, 룸에서 받는 월급이 더 많다며 끝내 거절하고 있다. 내일 모레면 경주가 있는데,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비 오는 날 경주로는 엉망이다. 경주로는 서해안에서 볼 법한 갯벌과 비슷하다.
"홍준관 기수. 검량."
나는 재결심의실, 장구 보관실을 거쳐 검량실로 향했다. 검량을 마친 후 기수 대기실로 돌아오다 김세영과 마주친다. 김세영은 지나갈 자리가 넉넉한 데도 어깨로 내 어깨를 밀치고 간다. 나는 대기실 옆 계단 위 기수들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올라가 공복을 이겨내려 담배를 한 가치 물었다. 원래도 체중 조절이 버겁긴 하지만 요즘 따라 식욕을 조절하는 게 버겁다. 여러 모로 배가 고프다. 사심 없이 전력 질주를 한 게 언제던가. 그 희열을 그리울 때가 가끔 있긴 하지만,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잃는 무엇인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얻는 무엇인가는 가시적이라고.
경주 20분 전. 대기실에 말 타러 나오라는 음악이 흘러 나온다. 대기실을 나와 지하마도에 정렬한다. 마장취채위원이 기수들의 모자 번호는 제대로 되었는지, 뭐 잘못된 것은 없는지 일일이 점검한다. 비가 와서인지 예시장에서 나와 있는 팬들이 적다. 뭐, 상관없다. 비 오는 날 경주를 하는 건 곡예를 하는 거다.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마음뿐이다. 카메라는 내 말 딕시레인을 포함해 우승 예상마들 몇 마를 잡았다. 나는 보안경을 세 개를 겹쳐 썼다. 시야 확보가 되지 않을 때마다 안경을 하나씩 벗을 계획이다. 발주대에 나가서 3분 전에 울리는 음악 소리, 그리고 발주 30초 전에 울리는 음악 소리.
"레디. 탕."
"출발했습니다. 경주는 1800미터. 제 9경주입니다."
흙이 안경에 튀니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보안경을 하나 벗었다.
"직선 주로를 빠져 나오는 열 한마의 경주마들. 아직까지 선두그룹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
딕시레인은 선행마였다. 뒤로 느껴지는, 무리지어 가는 레이스의 흐름을 파악하고는 흙이 두 번째 안경에 튀지 않게 머리를 푹 숙였다.
"킹 오브 레이스를 이어 딕시레인. 이어서 뉴레전드와 제라게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가다 보니 또 앞이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올 때는 경기 전개의 변수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 조교사는 오늘 주로를 읽었고, 외국말들의 상태, 주로습성을 파악했기 때문에 일찌감치 승부수를 띄우라고 그러나 중반부터 무리하지 않고 감아나가라는 계획을 세웠다. 순간, 관중들의 소리가 들렸다.
"악."
관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뒤에서는 낙마 사고가 일어난 듯 하다. 나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말들과 바짝 붙이려 하지 않고 불리한 줄 알면서도 바깥으로 선회했다. 이번 목표도 3위다. 돌덩이 같은 진흙이 얼굴로 마구 튄다. 찬 바람에 얼굴이 얼얼하다.
기수 대기실에서는 모니터를 보는 기수들의 큰 비명이 들렸다. 김세영이었다. 앞의 말이 제라게를 진로 방해했고, 하필이면 선행 그룹이라 중간 무리 속에서 달리는 말에 밟혀 큰 부상이 아니긴 하지만 응급실에 간 상황이었다. 나는 조교사 대기실로 갔다. 이조교사는 자리에 없었다. 다른 조교사는 이조교사가 잠깐 담배를 피러 윗층으로 갔다고 했다.
"그러게. 평상시도 말을 더럽게 안 들어."
이조교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가씨들이 경마가 재미있게 들렸는지 깔깔거리며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미친 년들. 사람이 다쳤는데, 정신이 나갔다. 황마담은 그들 중 둘을 나가있으라며 말을 끊었다.
"오빠. 우리도 나가자."
성애가 할 말이 있다며 나가자고 한다. 기집애는 내가 민낯이 좋다고 하자 오늘 따라 화장도 하지 않고 청순하게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왔다.
"나 월급을 3개월이나 못 받고 있어."
"3개월?"
룸에서 받는 월급이 세다고 떵떵거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월급을 받지 못했다는 말에 난 잠시 어안이 벙벙하다. 성애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학자금 대출액도 갚아야 하고 월세도 밀렸다며 황마담에게 대신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준관씨도 잘 알잖아요. 요즘 우리도 힘들어. 이제 연말 좀 되고 그러면 손님들도 많아지고 다 줄려고 그래요."
뭘 잘 안다는 건지 모르겠다. 가끔씩 180cm가 훌쩍 넘어 보이는 맷집 좋은 놈들 몇이 황마담과 술자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어주라는 것은 알겠다. 걔 중에는 캡 모자를 푹 눌러쓴 놈의 얼굴에 여드름이 울긋불긋 피어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이십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놈도 있다. 나는 일단 기집애가 밀렸다는 오피스텔 월세 몇 백만원을 빌려주기로 했다. 이후로 우리는 거의 살다시피 동거를 했다. 성애년은 돈을 받으니 공간을 열었다. 다음 경기까지는 3주 간의 시간이 있다. 아, 이 게으르고 풍요로운 정원. 나는 이 정원을 마구 파헤쳤다.
초겨울이 오고 이제 경마장엔 어김없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매년 있는 마사대부 심사 시즌이다. 32개 중 2개의 마방이 비어 있고, 그 중 한 마방이 정아무개한테 갈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박아저씨 아들의 결혼식도 다가왔다. 정장이 어울리진 않지만, 오랜만에 와이셔츠에 정장을 입었다. 날씨가 쌀쌀해져 코트도 챙겼다. 경마 관련업자들의 화환이 꽤 와 있었다. 박아저씨도 멀끔하게 정장 차림으로 차려 입고 왔다. 박아저씨는 화려하게 빛나는 자주색 넥타이를, 그의 아내는 자주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불현 듯 신부 측을 봤다. 아저씨가 말한 그 곱추였다. 곱추는 아내가 죽었는지, 도망을 갔는지 혼자 손님들을 받고 있었다.
"왔어. 어유. 고맙다."
박아저씨가 나를 맞는다. 나는 제법 두둑하게 가져온 축의금을 넣고 식권을 받았다.
식장은 층고가 높고 아담하다. 어두운 실내 조명에 촛불이 나란히 켜져 있어 아늑한 맛도 있고. 사회자가 곧 신부가 입장한다고 말한다. 신부는 키가 크다. 거기다 하이힐까지 신어서 그런지 박아저씨의 아들만큼 컸다. 곱추는 신부의 부모들이 앉아 있는 앞자리에 혼자 앉아 있다. 곧, 신부가 예비 남편의 팔짱을 끼고 입장한다. 요즘엔 트렌드가 그런 건지, 아니면 곱추인 아버지가 창피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다.
출생이란 각자에게 일정한 양의 특권을 주는 보편적이며 불가피한 복권이다. 타고난 신체도 그렇고, 사회적인 지위도 그렇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은 불공평하며, 그 대신에 행운, 불운과 같은 운명이 우연의 법칙에 의해 다시 그 불공평을 위로하기도, 혹은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사회에서는 법률이, 스포츠에서는 규칙이 공정한 경쟁을 성립시키려 애를 쓰지만, 헛일이다. 해가 뜨고 지고, 세계는 규칙성과 필연성의 영역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명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갓난 아기 시절 머리가 점점 커지는 병에 걸려 고통을 받고, 어떤 이는 십대에 몇십억 빌딩을 가진 건물주가 되기도 한다. 기수라는 직업은 한계가 있었다. 그럴 때 이조교사의 지시가 있었다. 우리만의 목장에서는 규칙은 잊혀지고 경시된다. 규칙은 거추장스럽고 위선적인 약속에 불과하다. 가혹한 경쟁도 너무 하지만, 때로는 지는 것도 비열한 공격이 되었다. 나는 식이 끝나고 경마관련업계 사람들과 식사를 했다. 식사는 뷔페식이 아니라 스테이크였다. 스테이크는 더럽게 맛없고 질기기만 했다.
성애는 잠자리에서만큼은 남자를 왕 모시듯 나를 모신다. 가끔 부동산이며, 시사 상식도 술집 기집치고는 잘 알고 있어 나이가 서른이나 되어 먹은 여자 같다. 말은 통하는데, 몸은 어리니 나는 좋긴 좋다. 또, 성애와 나는 비슷한 점이 많다. 몸이다. 난 맨몸으로 수백 명의 환호를 받는다. 전력 질주를 하여 1등으로 들어오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무시하고 천시하며 양반들이 부리는 권위. 이러한 몸은 곧 변방으로 벗어난다. 윗분들은 그러면서 가증스럽게 룸은 잘도 오는 것 같다. 성애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꽤 반반한 얼굴과 탱탱한 몸을 보면, 수술을 하도 받아 근육조차 붙지 않는 내 허벅지와 비교가 돼 젊음을 온몸으로 느끼곤 한다. 그러나 젊음도 언젠가는 시들겠지만. 그래서일까? 아니면 수술과 체중 조절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내 몸은 이따금 쾌락한 정신만큼이나 도취를 집요하게 갈망한다. 성애와 뒹굴 때면 기집은 관능의 박자에 맞춰 몸을 격렬하게 흔들어댄다.
"넌 자식은 낳을거냐?"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성애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요즘 사람들이 자식을 왜 낳아. 여자는 결혼하면 끝이야. 돈도 못 벌고."
성애는 천장을 보며 얘기했다.
"누가 그래?"
"뭐, 언니들이 그러죠. 경주 언니있잖아요. 딸 낳고 그 이혼녀. 딸 임신했을 때 배에 뭐지? 뭐라 그러더라. 임신줄인가. 아무튼 임신줄이 가고 살쪄서 배랑 엉덩이랑 튼살이 생기고 그런대요."
경기가 안 좋다더니, 뭐 기집년들 그간 수입이 꽤 짭잘했나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 이야기가 나온 것이 쑥스러웠는지 성애는 주절주절 더듬거리더니 갑자기 일어나 내 몸을 애무한다.
여느 날과 같은 하루였다. 김세영의 자살 기도 소식이 들렸다. 내부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적어도 눈치를 챈 사람들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이 경마공원이 개장된 이후 지금까지 기수 4명, 마필 관리사 2명, 간부 직원 1명 등 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세영 자살? 나로서는 의외였다. 유학까지 다녀온 놈이면 집안도 중산층 이상일 것이고 그러면 가게라도 차려서 살 것이지.
-모든 조교사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조교사들의 부당한 지시에 놀아나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주행검사부터 살살 합격만 할 정도로 타라하고 데뷔 전에 살살 타게 하고 다음에 쏘아 먹고, 말들은 주행습성이라는 게 있는데 그 습성에 맞지 않는 작전 지시를 내려서 인기마를 못 들어오게 하는 경우도 많았지. 이런 부당한 지시가 싫어서 마음대로 타버리면 말도 안 태우고 어떤 말을 타면 다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목숨 걸고 타야만 했다. 하루 빨리 조교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죽기 살기 준비해서 조교사 면허를 받았다. 그럼 뭐하나. 마방을 못 받으면 다 헛일인데. 면허 딴 지 7년이 된 나도 안 주는 마방을 가면허 딴 사람에게 먼저 주는 이런 더러운 경우만 생기는데. 그저 높으신 양반들과 친분이 없으면 안 되니. 프리젠테이션라는게 처음 생겼을 때부터 그랬다. 생각지도 못한 한 사람이 조교사 면허를 딱 받아 버렸네.
김세영은 오후 7시에 들어가 오후 10시까지 마누라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다음 날 이런 유서를 남기고 경마공원 숙소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은 없는 상태라고.
김세영은 조교사 개업 심사에서 외부위원들에게서는 합격 점수를 받은 반면 한국마사회 내부위원들에게서는 낮은 점수를 받아 최종 불합격한 것일 것이다. 정황상 그럴 것이다. 한국마사회 내부위원들이 5명이고, 외부위원이 2명이니. 마방을 받지 못한 것이 자살 시도의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마방을 임차하기 위해서는 3년 6개월 가량이 걸린다. 그렇다면 그는 6년 이상이 됐는데도 실패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유서에서 말한 정아무개는 면허취득부터 마방을 받기까지 1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니면, 원더블레이드를 빼앗겨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원더블레이드는 김세영이 망아지 시절부터 함께 해온 애마였다. 발주기에서 앞발을 드는 습성으로 악벽이 조금 있었지만, 훌륭한 말이어서 그로서는 자존심이 꽤나 상했을 것이다.
8번이나 반복되는 자살 기도 소식에 인터넷에서 여론이 들끓었다. 다행히도 언론의 흐름은 승부조작보다는 깜깜한 마방 임대 과정에 초점이 가기 시작했다. 경찰은 김세영이 회복하는 대로 수사에 들어갈 것이다.
길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데, 눈빛이 느껴진다. 옆을 돌아보니 초등학교 5,6학년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다 큰 성인 남자가 자신과 키가 비슷한 것이 신기했는지 계속 쳐다본다.
제기랄.
생각을 너무 많이 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술이라도 진탕 마셔야겠다.
오피스텔의 문을 두르려도 초인종을 눌러도 답이 없다. 귀를 대봤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룸으로 갔다. 룸으로 가니 황마담이 나를 맞는다.
"준관씨. 어쩐 일로..."
꽤 오래 룸을 안 가서인지, 김세영의 자살 기도 사건 이후여서 그런지 황마담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는 성애를 찾았다.
"지금 룸에 들어가 있어요."
황마담은 룸에 들어가 있다며 이조교사가 당분간 행동을 조심하라고, 만나는 것도 자제하라고 했다며 돌려보내려고 한다.
"돈 문제로 그러니 잠깐 나오라고 해요."
나는 황마담이 끈질기게 회유하자, 돈 이야기를 꺼냈다. 황마담은 돈 이야기가 나오자 언짢은 내색을 하고는 어쩔 수 없이 룸에 들어가 성애를 부른다. 성애는 긴 머리를 일자 단발 머리로 잘랐다. 그리고 꽤나 세련되어 보이는 블랙 원피스를 입고 나온다. 나는 성애의 손을 잡고 다른 룸으로 들어갔다.
"술 먹고 싶어서. 왜 전화도 안 받아?"
"황언니가 당분간 조심하라고 했어요. 연락도 자제하라고. 경찰서 연락왔어요?"
"하, 너가 언제부터 그렇게 황마담 말을 잘 들었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정적 속 흐르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성애는 뭔가 갈등하고 있다.
똑똑.
그 때, 룸 안으로 누군가 들어온다. 저번에 본 얼굴에 여드름이 좀 나고 캡모자를 쓴 놈이다. 놈은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하얀 피부에 키는 183cm가량 되어 보인다.
"성애야. 아직이야?" 성애년은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놈의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우리 둘의 관계를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순순히 자리를 내주었다.
"저 놈 뭐야?"
성애는 아무 말이 없다.
시합 날인 토요일이다. 10일 전만 해도 체중을 재보니 46kg나 되었다. 요즘 연말이라 자리도 많고 술이랑 이것저것 좀 먹었더니 체중이 불어버렸다. 부담 중량 45kg의 말에 기승하려면 알몸으로 43kg은 최소한 맞춰야 한다. 무려 3kg을 뺐다. 체중 감량이 어려운 건 그간 먹었던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복어회에 맛이 들려 소주랑 들이키는 것에 푹 빠졌는데. 제길. 식사량까지 조절해야 했다. 성애랑은 관계가 끊겼다. 술집 기집년이라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균형을 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놈을 본 기분이 뭐랄까. 씨발. 시정마가 된 기분이다. 경주 20분 전. 대기실에 말 타러 나오라는 음악이 흘러 나온다. 대기실을 나와 지하마도에 정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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