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은 없고 불확실성만 남은 ‘뉴노멀’ 국제 정치의 시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동맹’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는 동맹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관세를 올리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같은 군사동맹의 의미를 부정한다. 또한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떠받치는 국제기구, 예컨대 유엔을 “강한 어조의 편지를 쓰고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는” “공허한 말뿐인” 단체로 비하해왔다. ‘트럼프 독트린’은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이 수십 년 동안 공들여 직조한 동맹과 신뢰의 틀을 노골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런 조치들을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MAGA) 위한’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개시되어 1990년대에 절정을 구가한 ‘미국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1989년, 냉전 종식을 앞두고 프랜시스 후쿠야마(현 스탠퍼드 대학 교수)는 ‘인류사에서 가장 진화된 이데올로기인 미국의 자유주의 이념이 공산주의에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며 이를 ‘역사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의 역사철학적 선언은, 냉전 이후 미국이 월등한 군사력 및 경제력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정치)’와 ‘신자유주의(경제)’를 전 세계적 질서로 구축하면서, 진리로 입증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 패권의 쇠퇴를 이끈 21세기 초의 정치적 사건들은 후쿠야마의 선언이 시기상조였음을 알려준다.
미국의 시대는 어떻게 저물었는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과 대량파괴무기(WMD) 제거라는 명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하지만 대테러 전쟁은 대량의 군사·정치적 자원을 낭비하며 엄청난 사회적 비용만 남긴 채 미국에 실패를 안겼다. 여기다 미국의 주택금융시장 거품으로 촉발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동안 세계경제는 심각한 대침체를 겪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거대한 판타지에 균열이 일어났다. 마침 중국·러시아·이란 등 권위주의 및 정교일치 체제들이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와 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자로 서서히 부상하던 시기였다. 특히 중국의 기세는 위협적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뒤처리에 나선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국제정치적으로도 ‘아시아로 재균형(Rebalance to Asia)’ 전략을 추진했다. 그동안 중동에 과도하게 쏠렸던 미국의 외교·군사적 에너지를 아시아로 ‘균형 있게 재배치(rebalance)’해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단지 미국의 관심 지역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이전한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의 역할과 부담의 변경이 비중 있게 포함되어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미국이 추구한 세계질서는 ‘모든’ 나라가 참여해 정치·무역 규칙을 논의하고 합의하는 형태(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다자주의(multilateralism)였다. ‘대(大)다자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유엔이나 세계무역기구(WTO)가 대표적 사례다. 미국도 여러 나라가 함께 정한 규범을 적용받았다. 다만 미국은 다자주의적 규칙을 사실상 결정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다자주의는 미국에 질곡으로 작용한다. 전 세계 국가가 참여하는 만큼 (미국에 유리한) 합의를 도출해내기가 점점 힘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다자주의와 함께 양자주의(bilateralism)도 병행했다. 미국이 다른 1개국과만 군사·외교나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형태다. 양자협정에서는 미국이 자국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협상국보다 유리하다.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로 재균형’ 정책에서 아시아 각국(한국·일본·필리핀 등)과 기존 양자 동맹 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한편, 이 나라들을 엮어내는 방식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더욱 효율화하려 시도했다. 예컨대 미국이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 혹은 한국과 일본을 연결시켜 협의하는 형태다. 이를 양자주의와 ‘대(大)다자주의’ 사이의 ‘소(小)다자주의’로 부를 수 있을 터이다. 또한 이 소다자주의에 소속된 아시아 국가들에게 책임 및 경제적 부담을 나눠 지게 했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에 이미 미국은 자국의 힘만으론 세계 경찰 역할을 하기에 역부족이란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무역 부문의 소다자주의로 평가할 수 있다. 미국이 일본·오스트레일리아·아세안(ASEAN) 국가들과 멕시코·칠레 등 태평양을 둘러싼 12개국으로 구성하려 한 TPP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 주도의 무역 규칙을 표준화하려는 시도였다. 이와 함께 환태평양 지역의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다. TPP는 미국이 ‘관리 가능한 정도’로 축소된 다자주의였다. 이는 미국의 글로벌 지배 역량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역외 균형 전략(역내 동맹국들이 먼저 해당 지역 내 세력균형 유지에 노력하고, 중대한 위협이 있을 때만 제한적으로 군사적 개입)’ 등은 미국 단극체제의 쇠락이라는, 오바마 정부부터 이어져온 동일한 토대 위에서 등장한 구호다. 그러나 다른 점도 많다. 트럼프는 미국을 “외국의 경제적 약탈과 불법 이민의 문화적 위협으로 위기에 몰려 있는 분노에 찬 국가”로 재정의했다. 또한 워싱턴 엘리트들이 이끌어온, 미국의 이익을 넘어 세계질서 유지와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국제주의에 입각한 외교정책’을 실패로 간주한다.
전임 오바마 정권은 TPP로 환태평양 국가들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높여 (물론 미국이 주도하는) 협력적 국제관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유세에서 TPP를 “미국 경제에 대한 성폭행(It’s a rape of our country)”이라고 표현했다. 트럼프에게 무역은 ‘미국에 대한 약탈’과 동의어인 것이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급격히 발전한 한국·일본·EU 같은 동맹국들이 “적국보다 더 나빴다”라고 인식한다. 트럼프가 동맹국들에게 강제하고 있는 천문학적 규모의 대미 투자, 고율 관세 부과 등은 ‘배상금’에 가깝다. 그동안 동맹국 때문에 미국이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니 ‘배상’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트럼프의 행보는 상대국에게도 보복 비용을 발생시키며 동맹국 사이에 긴장을 고조하고 있다. 반면 기존 미국 주도 국제질서를 바꾸고 싶은 권위주의 국가들에겐 기회의 문이 열렸다.
중국은 미국의 무역 압박에 맞서는 공동전선 형성을 위해 외교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4월, 시진핑 주석은 미국 우호국인 베트남 등 동남아 3국을 방문해 100건이 넘는 협력 문건에 합의를 했다. 중국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심산이다. 지난 9월 말엔 “WTO에서 개발도상국 특별대우를 이후 협상에서 새로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공식 선언했다. 미국과 차별화된, 책임 있는 ‘정상 국가’로서 “다자간 무역 체제를 수호하고 글로벌 거버넌스 이니셔티브를 적극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새로운 글로벌 패권국으로서 입지를 다져나가는 행보로 보기에 충분하다. 9월3일,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나란히 걸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전 세계에 공공연히 과시하기도 했다.

미국과 인도의 관계 역시 주목할 만하다. 미국으로부터 50% 관세(상호관세 25% 포함) 폭탄을 받은 인도 역시 9월1일 중국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디 인도 총리가 시진핑 주석, 푸틴 대통령과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우리는 인도와 러시아를 가장 깊숙하고 컴컴한 중국에 빼앗긴 것 같다(Looks like we’ve lost India and Russia to deepest, darkest, China)”라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언급했다.
인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포섭 대상이었다. 그동안 미국은 인도에 공을 들였다. 인도에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방위산업이나 반도체 관련 첨단기술을 지원했으며 민수용 원자력 부문에서도 협력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다른 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지 않지만, 미국은 자국 주도의 소다자주의 안보·전략 협의체인 쿼드(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에 인도를 끼워줬다. 이는 중국과 영토 분쟁까지 벌이는 인도의 발전을 지원하는 일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관세 폭탄 이후 인도 내에서 미국산 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는 등 반미 감정이 고조되고 있다. 인도가 중국·러시아와의 협력 강화에 종전보다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이처럼 중국을 위시한 권위주의 국가들은 새로운 구심력을 형성하면서 미국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 한국·미국·일본·EU 등 ‘자유민주주의 진영’은 미국이라는 강력한 구심력을 잃고 파편화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이 주도해온 국제 자유주의 질서를 더 이상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팍스 아메리카나 속에 규칙 기반 질서를 영위해온 상대적 안정과 번영의 탈냉전 시대가 완전히 지나가고, 다시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인) 홉스적 세계가 재림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언(〈30년의 위기〉, 차태서)”까지 나오고 있다. 현재 전 세계는 2차 대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전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탈레반 재집권(2021년)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2023년)은 짙은 전운으로 세계를 뒤덮고 있다. ‘질서의 유지자’였던 미국이 자신의 지위를 내버린 상황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고, 여러 주요국에서 경제적·문화적 불안이 포퓰리즘과 결합하고 있다.

이 같은 위태로운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과 그의 자유민주주의 동맹국의 관계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당연하게도, 미국의 동맹 전략이 과거와 같지 않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이 냉전 이후 적극적으로 ‘가치동맹(민주주의·인권·법치·자유시장 등 공통 가치와 규범을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 전략을 펼쳐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동맹이란 기본적으로 군사안보적 개념이다. ‘집단 안보 연합체’인 동맹의 기원에 대한 대표 이론 중 하나는, 국가들이 그들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을 형성한다는 ‘위협균형 이론’이다. 예컨대 미·소 냉전이 절정이던 1970년대,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중국을 극비 방문하면서 미·중의 적대 관계를 해소할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미국은 소련과 중국을 분열시켜 소련을 견제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외교 전략은 재집권 이후 트럼프가 보여준 친러시아 행보를 분석하는 틀로도 활용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파트너십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러시아와 관계를 좁힘으로써 중·러를 분열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핵 억지력 확대’ 자꾸 언급되는 이유
하지만 냉전 이후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적대국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확산시키기 위한 가치동맹에 집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련이 서유럽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다자동맹체인 나토의 변화다. 1991년 말, 소련이 붕괴된 이후 나토는 설립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빌 클린턴 정부는 ‘관여와 확장’이라는 외교적 구호 아래 중동부 유럽의 공산주의 전환을 막고 미국의 자유 국제질서를 확산하고자 나토를 유지하고 확대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토를 탈퇴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협박과 으름장은 방위비를 절감하겠다는 의도 외에도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질서를 지키는 일이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트럼프 정부는 미국 본토 방어와 중국의 타이완 침공 억제를 국가안보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미국의 군사적 자원을 집중시키고자 동맹국의 자주 안보를 강조한다. 이제 미국의 동맹국들은 자신의 방어력을 높여 스스로를 지키고,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사시에 전 세계 주둔 미군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전략적 유연성’을 요구할 경우 이에 응해야 하는 새로운 군사적 도전에 직면하게 될지 모른다. 일부 국가에서는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방법으로 핵 억지력 확대가 언급되기도 한다. 핵무장을 한 북한·러시아·중국을 이웃 나라로 둔 일본에서도 비핵 3원칙을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한·미 원자력 협정 재개정 필요성이 언급되고 있다.
다른 한편, 위태로운 세계무역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 개방적 다자 무역협정이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최근 한국은 2021년 이후 논의가 중단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CPTPP는 TPP의 후신으로 2018년 출범한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일본을 비롯해 호주·브루나이·캐나다·멕시코 등이 참여하고 있고 지난해 12월에는 영국이 가입했다. “영국의 주도하에 EU가 CPTPP에 가입하는 등 더 광범위한 연합체가 될 수도 있으며” “WTO 무역 시스템을 정상화할 수 없을 경우 CPTPP 같은 개방적인 다자주의가 새로운 규칙 시스템으로 기능할 수 있다(‘무역전쟁 이후:규칙 기반 시스템의 폐허에서 규칙 창조를’, 〈포린어페어〉 2025년 9·10월호)”라는 기대도 나온다. 미국은 트럼프 1기 집권 당시 TPP를 탈퇴했다. CPTPP 활성화는 ‘미국이 제외된 다자주의 무역 체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적 가치로 설립한 국제 시스템을 미국이 스스로 부정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는 이미 시작됐다. 화약 냄새가 대륙을 가로지르고, 동맹의 가치가 급속히 쇠퇴하는 지금은 전간기(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기간)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현재의 체제적 혼란은 통제 불능 지도자에 의한 일시적 퇴행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를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과, 주권국가들의 다양한 욕망을 다스리며 손상된 자유주의 질서를 복구할 수 있는 (예전의 미국 같은) 강력한 단독자가 나올 수 없다는 예측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에 가깝다. 전 세계는 이제 동맹은 없는, 불확실성만 남은 뉴노멀을 맞이하고 있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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