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용기 내 추모, 함께 걸으며 기억 공유… 참사를 잊지 않는 사람들

문지수 2025. 10. 29.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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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시달려 추모 행사 참여 못 하다가
외국인 유족 방한 소식, 용기 내 통역 봉사
시들어가는 이태원 보며 추모 단체 꾸리고
추모글 디지털화에 일반 시민 참여 마련도
이태원 외국인 유가족 통역 자원봉사를 한 안나(가명)가 28일 서울 관악구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이태원 참사 3주기를 나흘 앞둔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 이재명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이란과 러시아, 일본 등 12개국 외국인 희생자 유가족 46명이 참가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러시아 혼혈인 안나(가명·27)는 이날 통역 자원 봉사를 위해 주황색 조끼를 입고 유가족들 옆에 섰다. 그는 3년 전 참사에서 가장 친했던 한국인 동료를 잃었다.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너무 커 추모 행사는 아예 참석하지 못했지만 이번에 어렵사리 용기를 냈다.


아픔을 나누며 위로와 용기를

안나는 참사 이후 지금까지 우울증, 강박장애 등에 시달리고 있어 계속 약을 먹어야 한다. 최주연 기자

핼러윈 축제 등을 즐기러 나왔던 시민들이 도심 한복판에서 스러진 이태원 참사가 29일로 3주기를 맞는다. 가슴 아픈 참사 현장 가까운 곳에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 안나도 그중 한 명이다.

3년 전 그날, 안나는 서울 강북구 식당에서 일을 마친 뒤 동료 A씨와 핼러윈 축제를 즐기러 이태원에 갈 예정이었다. 지방 출신 A씨는 처음 경험하는 핼러윈 축제를 앞두고 안나의 코스튬(분장 의상)까지 준비해왔다. 그런데 식당 점주가 핼러윈이라 손님이 많을 것 같다며 두 사람에게 '일을 더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결국 안나만 남기로 했고 이태원으로 간 A씨는 참사를 피하지 못했다.

다음 날 연락이 두절된 A씨를 찾기 위해 참사 현장에 가고, 운구가 옮겨지는 영상 등을 살펴본 안나는 지금까지 우울증과 강박장애, 불면증 등을 앓고 있다. 그동안 추모 행사에 갈 엄두를 못 냈지만 외국인 희생자 유족을 위한 통역 자원봉사 공지가 뜬 걸 보고 마음을 바꿨다. '타국에서 소중한 가족을 잃어 외로우셨을 텐데,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다.

안나(주황색 조끼)는 25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외국인 희생자 유가족들이 참여한 이태원 참사 3주기 시민추모대회에서 통역 등을 맡았다. 안나가 추모 행사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안나는 유가족 바로 옆에서 통역을 맡아 고인의 생전 이야기를 들으며 말벗이 돼 줬다. 서울 종로구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기억공간 '별들의 집'에 갔을 땐 동료 A씨의 사진을 보며 조용히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먼 길을 온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저도 위로를 받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참사 기억하는 다양한 공간 있어야"

2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에서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 활동가 이상민씨가 시민들의 추모글을 읽고 있다. 최주연 기자

참사 추모 활동 단체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 소속 이상민(30)씨는 올해 5월부터 매달 참사 현장을 둘러보는 시민 참여 행사를 진행한다. 해밀톤 호텔 옆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을 비롯해 분향소가 차려졌던 '이태원 광장', 주민들의 터전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부군당 역사공원', 상권을 둘러볼 수 있는 '세계음식문화거리' 등 6곳을 둘러본다. 희생자와 생존자뿐 아니라 이태원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각기 참사를 다르게 기억한다는 걸 소개하고 싶어서다. 2.5km가량 되는 경로를 1시간 30분 동안 함께 걸으며 서로 이태원과 관련된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다.

28일 이상민씨가 답사 코스 중 하나인 서울 용산구의 '녹사평 육교' 위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이씨는 피해자는 아니지만 용산구 주민으로서 참사 전과 달라진 이태원의 변화가 마음에 쓰였다. 코로나19까지 겹쳐 상권이 시들어가는 모습, 길을 지나갈 때 녹사평역 광장에 세워진 분향소에서 열린 시위와 현수막들이 눈에 밟혔다.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모아 독서모임 등을 가지다가 추모 활동 단체까지 꾸리게 됐다. 이 단체는 답사 외에도 생존자 인터뷰를 하며 기록집을 만들고, 추모 공연도 기획한다. 이씨는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도록 여러 추모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에 '이태원 기억담기' 활동에 참여하는 방법이 안내돼 있다. 빠띠 홈페이지 캡처.

이태원참사시민대책위와 사회적협동조합 빠띠는 '이태원 기억담기' 활동을 기획했다. 추모 현장에 수기로 적힌 메모지를 스캔한 뒤 빠띠 플랫폼을 통해 일반 시민들이 이를 타자로 입력해 디지털화하는 작업이다. 500명 이상이 동참해 지금까지 3만 장 중 96%가 데이터로 기록됐다. 1,502건의 추모글을 옮겨 적었다는 이주열(26)씨는 "현장에서 기록을 남긴 사람들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며 "이 기록물이 제게 위로가 되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가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껏 활동에 참여했다"고 했다.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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