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화차 주문을 받습니다

이연 꽃차소믈리에 2025. 10. 2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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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띠리링 띠링' 문자 알림이다. 지난주에 가을맞이 국화를 주문해놓고 깜박했는데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문자다. 이번엔 어떻게 생긴 꽃들이 오려나 설레기 시작했다. 발목 인대를 다쳐 며칠 동안 베란다 정원에서 파란 가을하늘을 올려다보며 몸과 마음이 들썩거리는 걸 겨우 참던 중이었다. 발목만 다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집안이 아닌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여기저기 노랗게 피어 바람에 산들거리는 들국화가 눈에 선했다. 다친 발목과 파란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며 "일주일 정도는 돌아다니지 말고 조심하세요."라고 강조하던 의사의 말을 떠올리니 한숨만 나왔다.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쉬어家 언덕에도 감국이 긴 가지를 늘어트리고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중이다. 올해는 계속되는 궂은 날씨 탓에 꽃으로 차를 제대로 덖어 보지 못하고 봄과 여름을 보냈다. 아쉬운 마음에 국화가 만발해지기를 기다렸다. 올해는 국화차를 많이 덖으려고 마음먹었다. 국화차가 얼마 남아 있지 않기도 했지만 향기로운 차를 친구들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얼마 전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그러다 친구들이 마시고 있는 찻잔을 무심코 살펴보게 되었는데 커피보다는 허브차가 더 많았다. 예전 같으면 식후에는 무조건 커피를 외치던 그녀들이었다. "얘들아. 너희들 커피 안 마시고 왜 허브차를 마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구동성으로 여기저기서 외친다. 커피 마시면 밤에 잠을 못 잔다고, 우리도 이젠 늙어 가나 보라고, 더 늙기 전에, 다리에 힘 빠지기 전에, 자주 만나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며 한바탕 웃는다. 즐겁기도 하고 한편 우리가 벌써 늙어 간다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쓸쓸하기도 한 하루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심신을 안정시켜주어 잠을 잘 때 도움이 되는 국화차를 많이 덖어 친구들에게 깜짝 선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띠리링 띠링' 다시 알림 문자가 왔다. 발목 다친 것도 까맣게 잊고 후다닥 현관문을 열고 긴 택배 상자를 집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탁자 위에 올리고 상자를 열어보니 꽃송이가 작고 여러 가지 색깔의 예쁜 국화가 가득 담겨있었다. 백자항아리와 유리 화병에 각각 꽃을 꽂아 식탁과 베란다 탁자에 올려놓았다. 우리 집에도 가을이 스며들고 있다.

국화차를 우려 베란다 탁자에 앉는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한 모금, 꽃을 바라보며 또 한 모금, 세상 부러운 것 없는 나만의 가을맞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도 그리 서러워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나 자신을 가만 헤아려보아도 그렇다. 가진 것도,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도 없는 내가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늙어 간다는 지금의 나이에 비로소 소소한 일에도 행복해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싹튼 것은 아닐까.

국화꽃이 가득 담긴 화병과 유리 다관에서 노랗게 피어나 하늘거리는 꽃차를 나란히 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문자를 친구들 카톡방에 올렸다. "얘들아 마음껏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 세상에는 커피 말고도 즐길 수 있는 차는 얼마든지 있어. 내가 올해는 잠 잘 자게 해줄 테니 모두 기대하시라.

추신:향기로운 국화차 주문을 받습니다. 가격은 그대들의 늙지 않는 마음입니다.

잠시 후 온갖 하트를 장착한 이모티콘이 카톡방을 소란스럽게 한다. 그 소란스러움이 정겹고 따듯하게 느껴지는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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