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사과 위 새 한 마리, 꿈과 행복을 노래하다
지붕새는 작업실서 연탄불 의지
전시회 집착않고 후배들 응원
'편안'과 '평화로움' 메시지 담아

길은 쉽게 줄지 않았다. 사전에 지도를 통해 머릿속에 담은 길과 실제 목적지를 찾으며 걷는 길의 차이가 적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 오른쪽으로 돌아 다시 왼쪽으로, 쭉 직진하다가 다시 왼쪽으로…. 씨줄 날줄처럼 얽히고 설킨 길들은 초행자의 어설픈 깜냥만을 확인시킬 뿐, 쉽게 목적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가장 물색없는 일은 길을 가는 동안 끊임없이 솟아나는 의심이었다. 거충 감을 잡아 선택한 길이다 보니 '과연 이 길이 맞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질 않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조금 전에 지났던 길을 다시 되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허탈감에 무릎이 꺾였다.

머리끝이 서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였다. 발걸음을 옮기다 낮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휘적휘적 길을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가 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이 길이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무슨 까닭인지 모른다. 그는 안경을 쓰고 단정한 차림새에 몸피가 크지 않은 데도 작은 거인처럼 보였다. 우리가 마주한 자리에는 'ART GALLY(아트 갤러리)'라는 글이 반갑게 서 있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ART GALLY' 1층은 작가의 공방으로 활용되는 공간이다. 작업할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와 작업대, 책상 등이 정돈된 모습으로 배치돼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작업대 옆으로는 작가가 그동안 몰두했던 많은 작품들의 원형들이 저장된 장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1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정춘표' 관련 자료들이다. 작가가 그동안 실시했던 개인전 포스터와 장석원 미술평론가의 글, 전국의 공공시설이나 도시의 이미지를 더욱 아름답게 부각시켜 주고 있는 작가의 조형물 사진이 붙어있다.
그중 흑백의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작가의 사진이 눈에 띈다. 한눈에 봐도 젊은 시절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작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작가는 조선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당초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던 중 조선대에 조소과가 신설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바꿔 광주로 내려왔다.
조선대에 입학한 이후 작가의 삶은 '不狂不及'불광불급이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열정적으로 학업과 작업에 몰입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목표를 세우고 이를 반드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좋은 작품을 위해 많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지만 학점 역시 잘 받기 위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죠. 당시에 흔했던 미팅도 한번 한 적이 없으니까요."


작가는 초창기에 여체女體가 지닌 아름다운 선과 생명력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표현해 주목을 끌었다. 대리석과 브론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여체에 꽃을 넣어 향기를 뿜고, 바람을 넣어 촉각을 건드리고, 새를 올려 청각을 두드리는 '오감 자극'이 특징이다. 편안한 표정의 여인상 시리즈는 풍요와 평화를 상징하며 한 마리의 새는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작품은 첫 전시회부터 주목을 끌었다. 지난 1992년 광주 화니미술관에서 열린 기획전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들이 새 주인을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순탄한 길만을 걸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작가에게 30~40대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기억된다. 여자로서 가정을 꾸리며 전업작가로 활동하는 것이 어려운 데다 조각을 위한 작업 환경마저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라인더로 깎고 다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분진, 도료의 독한 냄새 등은 작가 개인도 견디기 쉽지 않지만 주민 민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 사이 작업 공간도 내방동 빌라 단지 내 반지하실 등으로 몇차례 바뀌었다.

시대 흐름에 따라 작품 세계도 변화
작가는 지난 2000년 광주 광산구에 새로운 작업실 터를 잡았다. 많은 미술작가들이 담양이나 화순 등 광주 주변 도시로 옮기는 추세였지만 작가는 당시 장갑공장이었던 광산구의 한 장소를 최적지로 판단하고 이삿짐을 옮겼다. 조각을 위한 재료를 수시로 구입하는데 적합하고 집과 작업실의 거리를 감안한 선택이었다. 작업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냄새와 소음, 트럭이 들어설 수 있는 단층 구조 등도 중요한 판단기준이 됐다.
입주 초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지붕이 새고 벽에 틈이 생길 정도로 건물이 부실하다 보니 한겨울 작업실 내에서 밖에 눈이나 비가 내리는 풍경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이 작가의 창작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연탄불 하나에 의지한 채 두꺼운 버선과 옷에 털신까지 신고 억척같이 작품에 매달렸다.
작업 공간이 어느 정도 틀을 갖추게 된 것은 작가가 비와 눈 속에 4년을 견디고 나선 후였다. 건물의 외형을 반듯하게 갖추고 작업실에 필요한 장비도 하나둘 늘려가기 시작했다. 현재의 2층 건물로 신축한 것은 지난 2018년이었다. 작가는 기존의 건물을 모두 헐고 아예 새롭게 건립했다.
작가가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작품도 변화가 생겼다.

작가의 40대를 함께 한 '북어와 새'는 50대 이후 '사과와 새'로 옮겨갔다. 그는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사과'와 꿈이나 이상을 상징하는 '새'를 소재로 서정적이고 맑은 감성을 표현했다.
재료 역시 플라스틱과 브론즈, 알루미늄, 스테인레스 스틸, 대리석 등을 다룸으로써 그 물성에 따라 다양한 감성을 전달했다.
지난 2019년 4월 광주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美夢미몽-이브의 꿈' 전시회는 작가의 열정과 작품의 개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로 눈길을 끌었다.
"당시에 무려 1천800개의 사과로 전시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과는 하나로, 열 개로서 작품이 되기도 하고 군집으로 드러날 수도 있었죠. 또 공간 밖을 벗어난 설치작품이기도 했고 배치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미감을 더할 수도 있었습니다. 재료 역시 그동안 다뤘던 모든 것들이 사용됐는데 이것은 제가 해보고 싶은 팝아트의 실험이기도 했어요."
전시회를 계기로 작가의 '사과' 작품은 신세계백화점 명품관 1층에 번듯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
"좋은 관계 맺으며 향기나게 살고 싶어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편안'과 '평화로움'이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전해지는 행복과 희망, 아름다운 꿈 등은 본질적으로 편안과 평화로움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편안하게 여유를 찾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자 했다.
향후에는 의식적으로 특정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자신이 몰두해 온 작품 세계를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다. 조각가의 길을 걷는 후배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일도 뻬놓을 수 없다. 작가는 지난 2018~2020년 제15대 전국조각가협회 이사장을 맡아 광주비엔날레 행사에 전국 작가들을 초대해 전시장을 채우는가 하면 프랑스 파리 전시회를 갖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펼친 바 있다. 현재도 남도조각가협회장, 한국조각가협회 부이사장 등 많은 직책을 맡고 있다.
"작가는 삶 속에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작품에 새로운 방향이 잡히거나 전시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특별히 어떤 계획을 세우지는 않고 있죠. 회원전 등이 많아서 꾸준히 출품은 하고 있는데 남은 삶은 전시회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 맺으며 향기 나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글·사진=김만선기자 geosigi22@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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