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준의 골프세상] 필드보다 깊은 골프의 세계

[골프한국] 내가 다니는 골프 연습장엔 필드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연습에 열중하는 분들이 꽤 있다. 나이가 들면서 함께 라운드할 사람이 하나둘 줄어들고 경제적인 이유 등도 있어 필드로 나가지는 못하지만 골프와 단절할 수 없는 분들이다.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등산로입구에서 막걸리잔을 나눌 때 그들이 털어놓은 골프에 대한 생각이 심오한데 놀랐다.
이분들의 특별한 골프 세계를 전하고 싶어 이 칼럼을 준비했다. 지인 한 분의 시선을 빌어 연습에서 골프 철학을 만끽하는 분들의 얘기를 전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는 골프를 단순히 운동으로 보느냐, 삶의 일부로 보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실제 필드에 나가지 않고도 매일 연습장에서 골프를 대하는 이들의 행복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적 이유가 넘쳤다.
요즘 나는 필드에 나가지 않는다. 함께 라운드하던 이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주머니 사정도 그리 넉넉지 않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일 골프 연습장에 가는 일만큼은 멈출 수 없다. 하루라도 클럽을 잡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다.
누군가 묻는다. "라운드도 안 하는데 왜 그렇게 연습하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냥 치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그 '그냥' 속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누구의 시선도 없고, 경쟁도 없고, 오직 나 자신과의 대화만 남는다. 공 하나를 정성스레 올려놓고, 숨을 고르고, 스윙을 시작하는 그 순간. 그때 비로소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마음은 선(禪)과 만난다.
연습장이라는 좁은 공간은 나에게 가장 넓은 세상이다. 오늘의 공이 어제보다 조금 더 고요하게 날아오르면 그것만으로도 기쁘다. 완벽한 스윙은 없다는 걸 알지만, 그 완벽을 향해 다가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게 한다.
필드는 결과의 세계지만, 연습장은 과정의 세계다. 점수가 없으니 실수도 없다. 이곳에서는 실패조차 배움이고, 멈춤조차 쉼이 된다.
매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를 반복하는 일, 그 단순함 속에서 나는 복잡한 삶을 정리한다.
라운드의 환호 대신 연습장의 정적 속에서 나는 골프의 본모습을 만난다. 공이 날아가는 궤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을 보내는 내 마음의 궤적이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필드를 걷지 않아도 된다. 골프는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매트 위의 한 타가 내 하루를 밝히고 공의 비행이 내 마음을 맑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연습장으로 향한다. 필드는 멀어졌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골프와 가까이 있다. 그것이 나의 행복이고, 내가 만난 필드보다 깊은 골프의 세계다.
필드에서는 경쟁과 결과가 중요하지만 연습장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전부다. 공이 어디로 가든 누구의 시선도 없고 오직 내 스윙과 마음만 남는다. 이 반복 속에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다듬고 이해한다. 이것은 마치 수행자에게 좌선이 그러하듯, 골퍼에게는 스윙이 곧 명상이 되는 순간이다.
실제 라운드에서는 점수로 평가받지만 연습은 과정 자체가 목표다. 오늘의 타구가 어제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는 사실, 임팩트 순간의 느낌이 한층 더 선명해졌다는 감각 등 미세한 발전이 곧 행복의 근원이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완벽한 스윙'이라는 영원히 닿지 못할 이상을 좇는 것이다. 그 길 위에 있는 동안 나는 골프의 중심에 서 있는 셈이다.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가 미소를 머금은 경지를 누가 짐작이나 할까.
필드에서는 스코어 동반자 환경 등이 얽혀 복잡하지만 연습장은 단순하다. 공 매트 클럽 그리고 자신, 네 가지면 충분하다. 이 단순함 속에서 세속의 번잡함을 비워내고 마음의 무게를 덜어낸다. 골프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돌아갈 균형과 평정심을 얻는다.
필드는 무대이고 연습장은 서재다. 나는 필드에 나가지 않아도 하루하루 연습장에서 자신만의 '골프 일기'를 써 내려간다. 스윙은 문장이고, 리듬은 문체다. 내게 골프는 단지 몸으로 치는 게임이 아니라, 삶을 해석하는 언어이자, 자기표현의 도구이다.
라운드는 끝이 있지만 연습은 끝이 없다. 즉 나는 끝없는 여정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 여정은 외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골프와 깊이 교감하는 사람의 길이기도 하다. 나에게 골프는 더 이상 경기가 아니라 하루의 호흡, 마음의 리듬, 존재의 확인이다.
나는 필드를 떠났지만 골프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매일 연습장에서 느끼는 행복은 '라운드의 부재'가 아니라 '본질의 회복'인 것이다. 스코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순수한 공의 탄도, 그리고 그 공을 보내는 한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나는 매일 '필드보다 깊은 곳'를 라운드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방민준: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 30여 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30대 후반 골프와 조우, 밀림 같은 골프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골프 책을 집필했다. 그에게 골프와 얽힌 세월은 구도의 길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을 찾는 항해로 인식된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의견으로 골프한국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골프한국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길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news@golfhankook.com)로 문의 바랍니다. / 골프한국 www.golf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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