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만 이익 누릴 것”

유소연 기자 2025. 10. 2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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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장밋빛 전망 정면 반박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Midjourney

금융 당국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법제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한국은행이 스테이블코인의 위험을 경고하고 나섰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1코인=1원’처럼 한국 법정 화폐인 원화에 가치가 고정되도록 설계된 코인(가상 화폐)을 뜻한다. 한은은 27일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가치 유지를 장담하기 어려운 위험이 있는 데다 용처도 마땅치 않아 몇몇 발행사만 운용 이익을 누리는 수단에 그칠 수 있어 고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창용 총재를 비롯한 한은이 밝혀온 ‘신중론’과 일맥상통하는 경고다.

◇업계 장밋빛 전망에 반박

한은은 이날 150쪽짜리 ‘디지털 시대의 화폐, 혁신과 신뢰의 조화: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주요 이슈와 대응 방안’ 보고서를 내고 가상 화폐 업계가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이 필요한 근거로 내세운 주장을 대부분 반박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지 않으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통화 주권을 빼앗긴다’는 주장에 대해 “과도한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이라며 “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 등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다. 원화는 국내 상거래에서 가장 편리하고 거래 비용이 낮은 수단이기에 원화 수요를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광범위하게 대체하긴 어렵다는 설명이다.

한은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더라도 원화가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등의 확산은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날 기자 설명회에서 박준홍 금융결제국 결제정책팀장은 “화폐는 기술이 아니라 신뢰”라고 강조했다. 가상 화폐 세상이라 하더라도, 미 달러에 대한 압도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한 달러의 지배력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도전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일본과 유럽연합(EU)도 스테이블코인 관련법을 제정했지만 전 세계 약 2530억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9.7%는 미 달러 기반(지난 6월 기준)이다.

한은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비용이 낮고 효율적인 결제 화폐로 쓰일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해선 “24시간 결제망이 잘 구축돼 있고 상대적으로 카드 수수료가 낮은 한국에선 효용이 낮을 수 있다”고 봤다.

◇“발행사만 고수익 누릴 수 있어”

한은은 “용처가 이처럼 불명확한 상태에서 업계 대부분이 스테이블코인이 혁신을 위한 황금 열쇠인 것처럼 장밋빛 전망만 제시하다 보니 시장 기대가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런 환경이라면 스테이블코인 초기 발행량이 늘어나 (소비자 편익 증가 없이) 발행사가 준비 자산 운용을 통한 수익만 많이 얻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 화폐에 가치를 고정하기 위해 코인 발행량에 상응하는 현금과 단기 국채 등을 ‘준비금’이라는 형태로 쌓아 놓는다. 투자자가 환매를 원할 때 언제든 돈을 돌려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은 이 과정에서 은행의 예금 이자 같은 조달 비용 없이 이자 수익을 내 많은 돈을 벌게 된다고 한은은 설명했다.

한은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이익 일부를 은행처럼 예금 이자로 투자자에게 나눠줄 필요가 없고, 운용 수익을 국가에 귀속해 사회 전체에 공유하지도 않는다”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업계 주장대로 국익에 기여하고 혁신을 촉진할지 아니면 특정 발행사의 이익 향유로 끝날지 고민해 봐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상장사인 세계 2위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의 경우 준비금을 통해 나오는 운용 수익이 지난해 매출(약 16억6100만달러)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미국·유럽·일본 등은 법제화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하려 하고 있지만 한국엔 유통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관련 제도가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올해 안에 원화 스테이블코인 규율 체계 등을 담은 입법안을 확정하겠다고 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은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한은은 이날 “제도화 과정에서 여러 위험 요인을 잘 통제하더라도 성공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며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효용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금자 보호 안 되고 ‘코인런’ 우려

한은은 이날 보고서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시 문제점 7가지를 조목조목 짚었다. 지난 6월 금융안정보고서를 내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시 코인런(대량 인출), 금융 사고, 자본 유출, 통화 정책 유효성 저해” 등의 우려를 제기한 데 이어 다시 경고를 했다.

한은은 ① 법정 통화와 1대1로 연동된다는 약속이 깨질 위험이 있으며, ② 이런 위험이 생겼을 때 투자자들의 현금 상환 요구가 쏠리면 일반 뱅크런보다 전례 없이 매우 빠른 코인런이 생겨 그 충격이 전통적 금융 시장으로 퍼질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은행 예금 100만원은 한국은행 화폐 100만원과 늘 같은 가치로 교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화 스테이블코인 100만코인이 경우에 따라 100만원이 아닌 88만원에 거래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2023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을 때 달러 스테이블코인 USDC 한 개 가치가 0.88달러까지 떨어진 ​적이 있다. 담보를 맡긴 은행에 위기가 오자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며 ‘법정 화폐와 1대1 연동된다’는 약속이 깨져 버린 것이다.

③ 또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예금과 달리 ‘예금자 보호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등 소비자 보호 공백이 생길 수 있고, ④ IT 기업이나 유통 기업이 발행할 경우 우리나라 금융 제도 핵심 중 하나인 금산 분리 원칙이 깨질 수 있다고 했다.

⑤ 국내 투자자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익명 거래가 가능한 개인 지갑으로 옮긴 뒤 이를 달러 스테이블코인 등 다른 자산으로 전환해 해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자본 유출 위험도 있다. 글로벌 블록체인 거래 분석 서비스 업체인 체이널리시스는 지난해 전 세계 가상 자산 불법 거래의 63%가 스테이블코인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⑥ 한은으로서는 발행사가 통화량을 조절함으로써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효과가 약해질 수 있다는 점, ⑦ 은행이 예금을 받아 이를 필요한 사람에게 대출해주는 자금 중개 기능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로 옮겨가면 익명 거래가 늘 수 있다는 점도 우려 요소이다.

한은은 “은행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주체가 되거나, 주도적 역할을 책임지고 발행을 추진하면 앞서 언급한 문제 상당 부분이 현행 규제 체계에서 관리될 수 있다”며 “발행사 인가, 발행량 및 준비 자산 구성 같은 주요 사항은 별도 기구를 설치해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1코인=1달러’처럼 법정화폐 가치에 연동해 가격이 안정적(stable)으로 유지되도록 설계된 가상 화폐(coin). 원화에 가치가 연동될 경우 이를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라 부른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의 99% 이상이 달러 기반이고 원화 기반은 사실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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