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살 자신이 없다’, ‘새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내 존재가 삭제된다면 나는 기꺼이 yes다….’
SNS에 남겨진 누군가의 흔적들, 생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슬픈 글들입니다.
KBS 뉴스(2025.9.25.)
우리나라 자살 문제의 심각성이 통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2011년 이후 가장 많았습니다.
장창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 사회가 삶의 연결성을 상실했다는 어떤 증거, 신호로 보이거든요.
더는 사적이지 않은 사회적 재난, 자살. 이번에는 그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요?
가을을 맞은 대학 캠퍼스. 안수민 씨가 정신건강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행사 부스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정신건강 정책을 하나하나 꼼꼼히 안내합니다.
안수민/고려대학교 심리학부 2학년
이걸 학생들과 나눔으로써 굉장히 이 문제가 조금은 편하게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과정이 오히려 정신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시초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뿌듯하고
행사를 마친 수민 씨, 잠깐 쉬나 싶더니 곧바로 자습실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전공인 심리학 과목을 공부하기 위해섭니다.
이거는 임상 심리학이라는 과목이고, 심리 평가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는 과목입니다. 청소년기에 많이 힘들었고 그런 걸 통해서 내가 아팠던 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심리학을 선택하게 되었고.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동아리 활동은 물론 학업에 매진하고 있는 수민 씨. 하지만 고등학교 때만 해도 학업 스트레스로 불안이 심했습니다. 고3 무렵엔 공황장애와 조울증 진단을 받아 치료도 받았지만, 쉽사리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남긴 일기에는 “희망을 주지 말라”, “살고 싶지 않다”는 등 좌절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시험을 망쳤는데 그 이후로 썼던 일기예요. 그래서 (일기) 밑에 보면 '우리 조금만 해보면 안 될까' 이렇게 하면서 계속 스스로를 달랬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건강이 우선’이라며 다독였지만, 불안은 커져만 갔고, 수민 씨는 그만 수능을 불과 2주 앞두고 세상을 등지려 했습니다.
다행히 가족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신속히 옮겨져 목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때 회복하자마자 밀려온 건 후회였습니다.
딱 깨어났는데 엄마가 눈가가 시뻘건 거예요. 엄마가 그러면서 ‘너 진짜 죽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때 너무 속상해서 엄마를 봐서라도 ‘진짜 죽으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고.
수민 씨는 이후 공황장애 치료 약을 복용하고 상담도 받으면서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2년 전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안 죽어줘서 고맙다, 다행히 살아서 고맙다' 딱 그 얘기밖에 못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잘 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리고 네 덕분에 진짜 행복하다' 이렇게 얘기를 해줄 것 같아요.
이제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극복했던 경험을 공개함으로써 주변 친구들에게 힘이 되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그걸 왜 얘기해? 네 약점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는데, 저는 이게 약점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냥 감기처럼 아픈 거고, 언젠가 치유될 거고. 그리고 이건 함께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개인의 탓으로 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울 동작구청 종합상황실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유규진 씨.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바빠 보입니다.
노트북을 펴고 무언가를 확인하는 규진 씨의 눈과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인터넷에서 자살 시도가 우려되는 이용자들을 찾고 있는 겁니다.
유규진/공무원
(신원 파악이) 실패할 것 같다면 제가 DM(개인 쪽지)으로 접근해서 대상자 (신원) 부분을 확인하는 거죠.
규진 씨가 청소년을 돕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다가 외부 지원 없이 혼자 신고 활동을 시작한 지 17년째. 이처럼 퇴근 후 시간이 나는 대로 자살 관련 영상이나 SNS에 자살 관련 언급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집중 감시하고 있습니다.
생일에 죽는 것에 대한 언급, 자살을 다시 시도하겠다는 의지, 죽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까지... 이날도 한 시간 만에 3명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유튜브나 포털, SNS 운영사 측을 통해 이용자의 신원을 파악해 구조에 나서게 됩니다. 규진 씨가 2014년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신고한 것만 5만 건에 이릅니다. 10대 자살률이 10만 명당 8.0명에 이르는 만큼, 감시 대상 게시물의 70~80% 청소년들이 작성한 것으로 규진 씨는 보고 있습니다.
청소년 같은 경우에는 신고를 하잖아요. 대체로 대부분 내가 볼 때는 98% 이상은 살아요. 재시도 자체는 낮아요. 저는 청소년만큼은 자살률 제로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 시간까지 할애해 온 규진 씨는 직접 신고한 대상자가 무사하다고 확인했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누가 신고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너를 저주한다’ 이런 형태의 글이 있어요. 그러면 ‘일단 살렸구나’ 이런 마음이 드는 거죠. 신고에 대한 불만을 가지더라도 일단은 저런 흔적을 보면서 ‘다시 살렸구나’ 이런 부분들이 보이고.
극단적인 생각을 했다가도 상담이나 치료를 통해 극복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은 계속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만 4천872명으로, 1년 전보다 6% 넘게 늘었습니다. 전체 사망 원인 중 10대에서 30대까지는 자살이 10년 넘게 1위였고, 이젠 40대에서도 암보다 많습니다.
박정우/보건복지부 자살예방정책과장
코로나 팬데믹에 따라서 경기가 굉장히 위축되면서 실업률이 올라갔다든지 그런 상황들이 영향을 미쳤다고도 볼 수 있고.
자살률은 OECD 국가 평균보다 2.4배 높아 수년째 1위입니다. 10년 안에 자살률을 40% 줄여 불명예를 벗는 게 정부의 목푭니다.
김민석/국무총리(지난달 12일)
국민 누구도 삶을 외롭게 포기하지 않도록 정부, 지자체, 민간이 힘을 합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이를 위해 정부는 자살 시도가 발생하면 지자체 자살예방센터도 현장에 출동해 사례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추진합니다. 불법 추심이나 생활고, 직장 내 괴롭힘, 학교 폭력 등 자살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요인에 대응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나서도록 했습니다.
박현정/통계청 인구동향과장
자살예방백서상 자살 동기는 정신적 문제가 가장 크고요. 그다음에 해당하는 게 경제적인 문제, 세 번째가 육체적인 질병 이런 문제입니다.
모처럼 산을 오르는 한종현 씨. 4년 전만 해도 매일 찾던 곳입니다. 행사 전문 MC인 종현 씨는 코로나 대유행 기간에 일이 끊겨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수입이 1/8 수준으로 줄자 지하철 공사 현장에서 야간 신호수로도 일하면서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습니다. 그러다 극단적인 행동을 시도할 뻔했습니다.
한종현(가명)/50대 남성(음성변조)
하루도 안 빼고 (산에) 올라간 건 일단 일이 없으니까 할 게 없는 거예요. 차라리 폭우로 인해서 산의 일부가 조금 무너져 내리면, 나는 그대로 쓸려가면... 그래도 ‘자살보다는 사고가 낫겠지’라는 생각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던 종현 씨가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건 상담 전화 덕분이었습니다.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돼 준 상담 선생님이 오랜만에 종현 씨를 찾았습니다.
정택수/한국자살예방센터장
그때 4년 전에 새벽 2시 정도 제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정말 이젠 끝이다’ 그런 심정을 내가 느꼈거든요?
한종현(가명)/50대 남성(음성변조)
‘여기까지야, 여기까지야’라는 환청이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마지막 끈을 잡아보자’ 생각했던 게 교수님의 목소리였던 것 같아요. 큰 도움이 됐고.
자살 위기에 놓인 시민들의 벨소리가 24시간 울리는 이곳, 생명의 전화입니다. 전화를 받는 이들은 모두 숙련된 자원봉사자들입니다. 가족의 일처럼 상처받은 이들의 얘기를 마음으로 듣고 가식을 뺀 진솔한 조언을 건넵니다.
김청환/생명의 전화 상담원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거예요. 1억 3천만 원을 몽땅. 지금 죽음밖에 생각을 못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야, 당신은 아직 젊잖아’ 그래서 약간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었어요. 2시간을 (통화)하면서 그래서 그분이 나중에 ‘너무 고맙다, 나 살 수 있을 것 같다’ 얘기하는 걸 들을 때 정말 보람되죠.
지난해에만 전국에서 상담원 천5백 명이 11만 6천 건의 상담을 해냈습니다.
하상훈/생명의 전화 원장
선한 의도를 갖고 이곳에 봉사하러 오거든요. 그분들을 철저하게 우리가 훈련을 시켜서 이분들이 이 자리에서 1차 상담을 하는 거죠. 이런 형식으로 해서 민관이 협력해서 자살 예방 전략을 세워나간다면 우리나라 자살률 줄어들 수 있다.
정부도 자살예방상담전화 109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담 수요가 늘면서 오는 전화의 절반 정도만 상담원이 소화하고 있고, 미처 받지 못한 전화는 지역 정신건강센터로 연결됩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상담원을 기존 100명에서 140명으로 늘릴 예정입니다.
정택수/한국자살예방센터장
현장을 경험해 보면 현장에 정말 따뜻한 상담사들이 필요해요. 50분이고 1시간이고 충분히 들어주고 이런 지자체별로의 심리상담 전문가들 양성을 좀 많이 해서...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삶의 의지를 꺾는 근본적인 원인들을 찾아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장창현/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살은 현상이고 현상의 이유가 되는 것들을 입체적으로 추적해서 좀 지원해 가는 것을 저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존재감을 찾기 어려움, 전인적인 건강을 살피기 어려운 그런 것들을 다층적으로 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테이블이 옹기종기 놓여 있는 아담한 공간. 벽에 걸린 그림은 스스로 세상을 저버린 가족을 기리는 유족들이 그린 자화상입니다.
박인순/유족 모임 활동
릴레이식으로 그림을 그린 거거든요. 그 의미가 뭐냐면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었어도 우리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일어나 보자 그런 의미로 그렸는데
16년 전 우울증을 앓던 20대 아들이 떠난 뒤 홀로 고통에 빠져있던 인순 씨. 상담 프로그램과 유족 모임을 통해 조금씩 일상을 되찾았고, 이제는 다른 유족들을 상담하는 데 큰 보람을 느낍니다.
동일한 아픔을 겪은 분들과 함께 나누면서 ‘얘, 내 감정이 오늘은 이래’ 하면 ‘나도 그래’ 그러고 울고, 그런 것들이 참 큰 도움이 됐죠. 그러니까 사회적인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더라고요.
누구보다 힘든 청소년기를 이겨낸 스무 살 수민 씨.
안수민/고려대 2학년
저의 미래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것 같아요. 힘들었으니까, 누구보다 더 잘 공감할 수 있고 누구보다 더 남을 도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저의 꿈입니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힘내라는 말보단 그냥 ‘잘 버티고 있다. 그냥 이대로만 해도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해주고 싶고. ‘그래, 나 그래도 이 시기가 있었기에 내가 많이 성장했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