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 왕릉이야기] 21. 조선왕릉 태릉

하인수 경주대학교 특임교수·문학박사(풍수지리 전공) 2025. 10. 2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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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흩어진 왕실의 비극, 태릉에 잠들다
▲ 태릉 전경(. 궁능유적본부)

태릉(泰陵)은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의 능이다. 문정왕후 윤씨는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딸이다. 중종의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 윤씨가 1515년(중종 10년) 세자(인종)를 낳은 뒤 6일 만에 산후병으로 승하하자, 151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과 문정왕후 소생으로 명종(明宗),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를 두었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고 1545년 12세의 어린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8년간 수렴청정하였다. 중종 말∼인종∼명종 시기에 권력다툼을 위해 인종 외척인 윤임 일파 대윤(大尹)과 명종 외척인 윤원형 일파 소윤(小尹)이 사생결단으로 맞붙었다. 소윤의 우두머리 윤원형의 누나인 문정왕후는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대윤의 우두머리 윤임 등 100여 명의 반대파를 죽이는 등 대윤을 제압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매관매직, 부정부패를 일삼고, 중종이 폐지한 승과를 부활시켰다. 조선의 숭유배불(崇儒排佛)을 무시하고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정릉 가까이 있는 봉은사를 왕릉을 보호하고 선왕의 명복을 빈다는 명분으로 원찰로 삼아 많은 전답을 하사하는 전횡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또한 문정왕후는 사치와 허영심이 심했다. 자신을 포함해서 앞으로는 모든 왕릉에 병풍석을 설치하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정릉을 화려하게 보이기 위해 병풍석을 설치하였다.

▲ 홍살문

1565년(명종 20) 4월 문정왕후가 65세로 승하하자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능호를 신정릉이라고 했다가 두 달 후 6월 태릉으로 고쳤다. 약 3개월의 공역으로 7월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성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 곁에 묻히고 싶어 둘째 왕비 장경왕후 옆에 있는 중종릉을 대신들의 반대에도 지금의 자리인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겼다. 이는 문정왕후 본인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으므로 자신의 능과 함께 쓸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매년 장마철과 집중호우 때면 정자각까지 침수가 되어 보토를 하곤 하였다. 문정왕후는 중종 옆으로 가고자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원구 공릉동 현 태릉에 조성한 것이다.

▲ 태릉 전면

태릉은 왕이 아닌 왕비의 단릉(單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하였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 중앙에는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원래 십이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神像)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특별하다.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0cm로 거대하며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과 창릉(昌陵)의 경우만 예외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 태릉 후면.

남향의 태릉은 내룡맥이 힘차게 들어와서 입수와 선익을 형성한 터이다. 그러나 청룡과 백호의 관쇄가 약하고, 안산(案山)인 봉화산이 혈장으로부터 멀어서 수세의 유출이 강하다. 안산의 거리가 멀 경우에는 음택지가 아니라 양택지로 적합한 곳일 수 있다. 게다가 이곳은 사신사(四神砂)가 느슨한 곳으로 왕릉의 터로는 아쉬움이 많다. 부족하고 취약한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태릉선수촌 조성 이전의 옛 공간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 고증을 거쳐 수세에너지 유출을 막는 연지 복원 또는 인공 연못의 조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 큰 가로수를 풍수적 자원으로 활용하고, 연지 등과 연계하여 조선왕릉 능역의 특색 있는 풍수 공간으로 조성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 태릉 능역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선수촌이 있었다. 2017년 충북 진천으로 이전하여 '진천선수촌'이라 하지만 이전하기 전 2017년까지는 국가대표 선수촌의 이름도 근처에 있는 문정왕후의 능호를 사용하여 '태릉선수촌'이라 하였다.

▲ 능침

4회차에 걸쳐 우유부단한 햄릿을 닮은 중종릉과 세 부인들 능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종은 첫 번째 부인과는 19살에 강제 이혼을 당한 후, 39년이 흐른 자신이 죽는 날 재회를 했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파묘를 당하는 두 번째 부인은 지켜주지 못하였다. 종국에는 욕심이 과한 세 번째 부인에 의해 자신이 파묘 당한다.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의 욕심으로 인해 중종과 세 왕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자기 능과 아버지 능은 파헤쳐진다. 반정(反正)의 행운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복잡하면서도 슬픈 정통성 없는 중종의 왕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