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울산여지도] 서원마을, 울산 최초 사액서원의 땅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2025. 10. 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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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요충지 상징의 공간
질읍을 넘어 문읍도시 지향
울산의 정체성 흐르는 장소
김진영 편집국장·이사

 <지리의 힘>을 엮은 팀 마샬은 "인류는 결국 지리라는 감옥에 갇힐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국제문제 전문 저널리스트가 세상을 바라본 기준은 지리였다. 고산자가 조선이라는 땅을 수레에 끌고 한 발 씩 이 땅을 밟으며 인문과 지리를 기록한 것은 조선이라는 자신이 사는 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해 보려는 끝없는 시도였다. 그만큼 땅의 역사는 그 땅에 사는 사람의 역사로 남기 마련이다. 

 울산의 지리를 살피면 신라가 왜 울산에 수많은 불사를 벌이고 북국토를 만들려 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울산은 신라의 해안 방어선이자 국제무역항이었기에 신라의 왕실은 울산에 대한 투자를 지속적으로 이어왔다. 물론 신라가 멸한 뒤 한때 귀양의 땅으로 버려졌던 적이 있었지만 그 시절은 다분히 고려 왕실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의도적 내침이었다. 그런 울산은 조선조에 와서 위상이 되살아 났다. 조선 조정은 오늘의 육군사령부와 해군사령부 격인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과 수군절도사영을 울산에 두고 왜를 경계했다. 그런 증좌를 살피면 신라부터 조선까지 울산은 지리적으로 관방의 도시, 군사적 요충지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풍속조를 펼치면 울산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적혀 있다. 무예를 숭상하고 상업을 좋아하며, 타고난 품성이 굳세어서 문풍을 일으켜 쉽게 교화할 수 있다(尙武藝 好商賈 稟性剛毅 可以興文 而易化)는 기록이다. 

 여기서 '무예와 상업을 좋아하는 경향'은 다소 촌스러움을 의미하는 '질(質)'에 해당하고, '쉽게 교화할 수 있다는 특성'은 '문(文)'에 해당한다. 울산이 무예와 상업을 중시하는 '질읍(質邑)'의 성향을 가졌지만, 타고난 품성이 좋아 쉽게 지성인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 수 있다. 

 질읍과 문읍은 과거 사대부 사회에서 특정 지역의 풍성을 풀어보는 기준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한 고을의 사회적·문화적 위상을 문과 무, 상거래로 구분했다. 오늘의 의미로 '산업도시(질읍)'와 '문화도시(문읍)' 정도로 풀 수 있다. 물론 단순한 구분을 넘어 고을의 급수를 나누는 차별적 성격도 있었다. 실제로 질읍(質邑)으로 치부하는 지역은 과거(문과) 합격자 수가 적고, 학문적·문화적 수준이 낮은 고을이라는 천시의 의미가 깔렸다.

 결국 문과 급제자가 거의 없었던 울산은 무예를 좋아하고 상업을 숭상하는 지역으로 낙인 찍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울산은 무예와 상업을 숭상하지만 문읍(文邑)으로 바뀔 수 있는 기본적인 풍토가 있다는 각주를 단 것으로 보아 2,000년의 문화적 토양을 무시하지 못한 듯하다. 그렇다면 울산의 문읍은 어디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번에 울산여지도가 찾아가는 땅 구강이다. 

 울산에서 문읍의 시작점은 서원마을이라는 동네 이름이 남아 있는 반구동 구강서원이다. 구강서원이 자리 잡은 반구동은 태화강 문명의 중심이다. 그 뿌리가 무려 2,000년을 넘어서는 세계무역의 중심지였던 태화강 하구의 두물머리다. 태화의 아랫도리는 신라 이전부터 장생포 만호진성, 염포영성, 개운포 만호진성이 동해 바다와 맞닿은 곳에 진을 쳤던 관방의 중심이었다. 국제무역의 거점이자 국방의 핵심시설이 밀집한 요새 중의 요새였기에 철옹성을 지었다. 

 반구의 역사는 그만큼 오래고 깊다. 이 땅은 태화강 100리의 물줄기가 동쪽 끝에 닿는 곳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신라 말 이후 축조된 계변성, 울주성, 병영성, 울산읍성, 왜성 옛터 등이 존재했다. 여기에 울산 유일의 사액서원인 구강서원과 임진왜란 이전의 울산향교도 이 땅에 자리 잡을 정도로 태화강 문명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신라의 멸망은 울산에게 엄청난 사건이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기기 직전 울산 동부 권역에서 불사를 일으키며 호족 박윤웅을 권력의 뒷배로 삼으려 했지만 상술의 귀재 박윤웅은 왕건의 뒷배를 자처했다. 

 이후 고려 조정은 몰락한 왕조의 흔적을 없애야 한다는 판단으로 서라벌과 울산을 지우기 시작했고 결국 울산은 망국의 땅이 됐다. 무엇보다 고려 초 국권을 확장하려는 성종이 전국을 순시할 때 태화강변에서 주연을 펼친 직후 귀경길에 몸저누워 승하한 사건은 울산으로서는 불행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울산을 역모의 성지가 될지 모르는 땅으로 판단해 철저히 유배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서역과 통하던 항만은 뻘밭이 됐고, 도읍지(개경)와 연결된 직로는 황폐해졌으며, 옛길은 점차 종적을 감췄다. 

 이처럼 오랜 기간 쇠퇴와 유배의 땅으로 여겨졌던 울산이기에,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서원의 탄생은 문읍으로 나아가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울산의 구강서원과 언양의 반구서원은 향촌의 양반 지식인들이 향토의 명예를 걸고 '학문을 숭상하고 예법을 지키는 고을'임을 내세우려 했던 당대 최고의 교육사업이었다. 

 울산 중구 반구동에 위치한 구강서원은 울산 유일의 사액서원이자 조선시대 울산 지방 최초의 사립 교육기관이다. 사액은 임금이 편액을 내린 정통성을 가진 사원을 의미한다. 구강서원은 효종 10년(1659년)에 울산 출신 사림인 배두첨 등 11명이 창건을 발의했다. 이후 총 3차에 걸쳐 사림 55명이 공동 출자해 1678년 현재의 서원 마을에 세워졌다. 그 뒤로도 곡절이 많았다. 조선조가 기울어지던 1871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됐다가, 지난 2003년 다시 세웠다. 

 구강서원은 우리가 익히 아는 다른 서원들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아 보이지만 서원에 있어야 할 시설을 모두 갖춘 내실 있는 유교 시설이다. 지금 구강에는 선현을 모시는 사당인 묘우(廟宇)인 숭도사, 제수를 관장하는 전사청, 착한 길을 인도하며 교육하는 강당(講堂)인 지선당(至善堂), 심신을 재계하는 서재(書齋)인 경신재(敬信齋) 등이 모두 갖춰져 있다. 후대 울산인이 구강서원을 다시 세운 뜻은 무엇일까. 무예와 상업을 숭상했던 질읍도시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발현하는 문읍도시 울산의 미래성을 지향한 뜻이지 싶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